단야천추(短夜千秋)

며칠째 길을 잃었다. 꼿꼿하게 뻗어 있는 대나무들은 하늘을 가렸으며, 안개와 댓잎을 뚫고 내려온 한줌의 달빛을 제외하면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짚을 삼아 만든 신은 이미 말라붙은 잎투성이였다. 박성보는 두루마기의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쳤다. 말총이 삐져나온 갓이 흘러내렸다.

 

즉위한 지 3. 임금이 증광문과를 실시한다 하여 과거 길에 오른 지가 언제였던가.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합격하여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결심했던 때였다. 일찌감치 도착해 자리를 잡고 목욕재계하며 과거를 준비해도 모자랄 지경이거늘 길을 잃다니. 이래서야 선접꾼에 치어 제대로 시험을 치를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꼭 성보의 탓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왜인지 모르나 요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를 뒤쫓고 있었던 탓이다. 그는 무술을 닦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아 활솜씨가 썩 좋았기에 화살을 쏘며 요괴에 맞섰다. 가지고 있던 화살 모두가 정확하게 노리던 곳을 맞추었으나 요괴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성보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경하여 근처의 숲으로 몸을 날린다는 것이 그만 이 꼴이 돼버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요괴는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으나 이 숲이란 장소도 묘했다. 대숲 전체에 뿌연 안개가 깔려 있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안개를 보니 근처에 물가가 있을 것이고 수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숲에서 빠져나갈 길이 나오리라 여겼다. 하지만 결국 날이 저물 때까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이런 산에서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내 덕분이었다. 쓰러질 것 같은 때면 언제라도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했다. 무사히 돌아오시길, 무사히 돌아오시길. 그러고 나면 이제껏 지쳤던 것이 거짓인 양 몸 전체에 힘이 솟았다.

 

오늘도 결국 길을 찾지 못하는가. 한숨을 푹푹 내쉬던 차에 저 멀리 불빛이 보였다. 시체 위로 떠오르는 푸른빛도 아니고, 간신히 땅에 닿은 하얀 달빛도 아니었다. 나무를 태우는 붉은 불꽃의 색이었다. 성보는 정신없이 불빛을 향해 달렸다.

 

밤의 불빛은 먼 곳까지 비치니 긴 길을 각오하고 있던 바였다. 다행스럽게도 생각만큼 멀지 않았던지 금방 불빛이 흘러나오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나무가 없는 공터였다. 성보는 공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기분 탓인지 공터 안쪽은 안개가 훨씬 엷어진 것처럼 보였다. 중앙에는 한 명의 스님이 앉아서 들고 있는 지팡이를 부지깽이 삼아 모닥불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불티가 튀며 타닥거리는 소리를 냈다. 기척을 눈치 챈 스님이 지팡이를 놓고 삿갓을 들어 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앉은 채로 고개를 쳐든 모양새가 되자 스님의 몸가짐이 한눈에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그 목에는 노랗게 빛나는 두 개의 구슬을 명주실에 꿰어 만든 목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그 보주의 크기와 빛이 문외한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재물을 탐하는 중이라면 분명 제대로 불법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혹세무민하는 사이비 땡중일 것이다. 성보는 마음을 다잡으며 스님을 향해 다가갔다.

 

한성에 사는 박 가()라 합니다.”

 

성보의 인사를 들은 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사바세계의 허물을 벗기 위해 수행 중인 몸, 승천이라 합니다.”

 

듬직한 체구와는 다르게 가느다란 느낌이 나는 목소리였다. 이어서 승천은 성보에게 쉬라고 권했는데 오래 쫓기고, 오래 헤맸던 성보는 사양하지 않고 주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며칠 동안 길을 잃어서 쉬지도 못하고 걷기만 했소. 이렇게 사람을 만나게 되었으니 정말 다행이구려.”

 

승천은 살짝 웃으며 물었다.

 

선비께서는 과거를 치르러 가십니까?”

그렇소. 어찌 아시는지?”

그런 선비가 아니라면 이 숲에 들어오지 못하니까요.”

 

그다지 납득이 가는 이유는 아니었다. 성보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 숲이 어떤 곳이기에 과거를 보는 선비만 들어올 수 있다는 거요?”

이 장소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숲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만.”

숲이 아니라 함은?

신시(神詩)가 잠든 곳이지요.”

 

성보 역시 그 이야기는 들어본 바가 있었다. 그 해 과거에 나올 시제와 답안을 가리키는 말로 전대의 정승이었던 김창집 역시 산에서 동자승이 점지해 준 글을 받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왜 이런 게 있는가 하니, 신령이나 부처가 나라가 쓰러지지 않도록 인재를 보내기 위해서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김창집의 가계는 증조와 부친이 정승을, 형제는 성균관대사성과 판서를 지낸 유서 깊은 명문이다. 어릴 적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면 보다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말일 것이요, 우연찮게 기연이 작용했다면 사마시가 아니라 임금 앞에서 치르는 문과에서의 덕이었어야 더욱 조리가 설 것이다. 잠깐이나마 놀란 자신이 부끄러웠다. 성보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허무맹랑한 말이구료.”

그렇습니까?”

 

승천의 태도는 초탈했다. 성보가 믿거나 말거나 별로 상관이 없다는 투였다. 탈속한 듯한 그 태도가 성보의 흥미를 끌었다.

 

그럼 신시가 어디에 있소이까?”

허무맹랑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승천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 태도에 성보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물론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지. 그러니 확인을 하고 싶은 것뿐이오.”

선비님의 말씀은 저와 문답을 나누고 싶다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해 추궁하고 싶기는 했다. 그걸 문답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별반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성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천은 대답했다.

 

저 역시 그건 바라던 바입니다.”

바라던 바라고?”

제가 지금부터 한 가지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성보가 의문을 가지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승천은 말을 이었다. 다소 불쾌했지만 승천은 참고 물었다.

 

그건 아까 말했던 신시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요?”

물론입니다. 들어주신다면 저는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 드리지요.”

 

과거에 늦지 않기 위해서라도 빨리 길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로서는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거절하기 힘든 이야기로군. 나는 뭘 하면 되오?”

 

승낙이나 마찬가지인 그 대답에 승천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나는 해답을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불티가 튀었다. 승천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한성 소의문(昭義門), 저희들이 말하기로는 서소문(西小門) 밖 거리에 한 선비가 살았습니다. 숙부의 친우의 딸과 결혼하여 금슬이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었습니다. 부부 모두가 이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선비는 양자를 들여 대를 잇기로 하고 축첩을 거부하였습니다.”

.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흔하지도 않은, 그런 부류로군. 그 선비가 누구요?”

벼슬길에 올라 별견어사 직을 훌륭히 수행하여 그 명성이 드높았고, 훗날 그를 기꺼워했던 임금에 의해 영의정까지 추서된……실로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보는 지난 사직 속에서 정승을 지냈던 사람들 중 별견어사로 명성을 떨쳤던 자가 있는지 생각해 보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그는 자세를 편히 잡았다.

 

많은 선비들이 그러하듯, 이 선비 역시 청운의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학문과 무술을 닦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특히 활쏘기를 즐겨 백보 앞에서도 솔방울을 화살로 쏘아 떨어뜨렸다고 하니 저처럼 손이 둔한 놈도 그 수준을 익히 짐작할 만 합니다.”

나도 활쏘기는 즐겨 했소. 심신을 닦는데 큰 도움이 되지.”

 

성보는 등 뒤에 걸어놓은 활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숲에 들어오기 전 화살을 다 쓴 채로 쫓기다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쥐었던 주먹을 폈다.

 

화살을 쏘기 위해 자주 서소문과 돈의문 옆에 있는 서지(西池)로 산보를 나갔습니다. 서소문은 송장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문이고, 바로 바깥에는 죄수들을 처형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망자의 원과 한이 끊임없이 맴도는 땅이라 예로부터 음기를 먹고 사는 물괴와 귀매, 망량이 많이 살았지요.”

망량이라니…….”

 

성보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지에 핀 연꽃은 수랏상에 올리는 재료다. 그런 호수에 요괴들이 많이 산다고 떠들고 다녔다간 당장 금의부에 잡혀가 치도곤을 치를 터였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 단순한 허풍을 떤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지만, 그 내용은 허풍 이상으로 보기 어려웠다. 요괴?

 

과거 이런 것들을 퇴치하는 것은 불법을 익힌 승려나 무속의 무당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술을 빼어난 수준으로 연마한 선비들 역시 본의 아니게 이러한 일들을 하곤 했는데, 어쨌거나 이 선비 역시 그러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요괴를 만났단 말이오?”

곤충이나 동물 같은 것이 변화하였으니 정확히는 물괴라 하지요. 구렁이입니다.”

 

성보의 질문에 승천이 대답했다. 하지만 성보는 그런 분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관심을 끌기 위한 선정적인 야담. 괴력난신은 선비가 머리에 담을 바가 아니었다.

 

소나무를 길게 휘감고 있는 구렁이였는데, 무슨 요술을 부리는지 주위 사람들이 구렁이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때 구렁이는 극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무언가 먹을 만한 것이 있나 찾아 해매고 있었지요. 발견한 것이 한 갓난아기였습니다. 어떤 아낙이 빨래를 하는 동안 강보에 담아 그루터기 근처에 놓아둔 것입니다. 선비가 구렁이를 본 것도 그때였습니다.”

 

승천의 이야기 솜씨는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었지만 성보는 그 상황을 뚜렷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성보는 침음을 삼키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의심 가는 바가 있었지만 아직 확신할 수가 없었다.

 

선비는 지체할 것 없이 활을 꺼내들었습니다. 재빠르게 화살을 걸고, 힘 있게 시위를 당긴 후 손을 놓았지요. 매서운 화살은 그 동안의 수련을 보여주는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선비가 원하던 곳, 구렁이의 머리를 꿰뚫었습니다.”

정말로 머리였소? 다른 곳이 아니라?”

정확하게 머리였습니다.”

 

성보는 질문했고 승천은 단언했다. 성보는 입을 다물었다.

 

구렁이는 죽기 전 선비를 향해 저주를 토했습니다. 자신을 죽인 그 선비에게 복수를 해 달라는 기원이었죠. 서소문 바깥의 모든 요괴들이 구렁이의 기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비는 어떻게 됐소?”

당시에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진짜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비웃는 듯한 말이었으나 어조는 평이했다. 그 부정합 때문에 성보는 성질을 부릴 때를 놓쳤다. 그가 멈칫거리는 사이에 이야기는 다시 이어졌다.

 

시간은 흘러 당대의 임금이 증광시를 실시하겠다고 포고를 내었습니다. 선비는 그 동안 닦은 학문을 펼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뒷바라지를 하는 아내에게 보은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과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를 노리던 요괴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아니할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요괴 역시 선비를 쫓아갔습니다.”

 

들판을 걷는 선비와 그 뒤를 쫓는 요괴의 모습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자신이 겪은 일이었으니 당연한 노릇이었다.

 

선비가 활에 능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요괴는 두터운 갑옷을 두른 채였습니다. 그 노림수는 적중해 선비의 화살을 모두 막아내었지만, 그 사이에 선비는 잡히지 않고 대숲 안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대숲 안에는 안개가 깔려 쉬이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가 피워져 있는 불꽃을 발견하고 그쪽을 향하니 거기에서 스님처럼 생긴 자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까지 와서 이야기 속의 선비가 누구인지, 스님처럼 생긴 자가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성보는 갓끈이 지나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길을 물으니 돌아오는 것은 신시란 대답이니 선비는 황당무계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신시의 행방을 묻자 이야기를 듣고 답을 내는 것을 도와 달라 했습니다. 이후 이야기를 시작하니 첫 구절이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성 소의문, 저희들이 말하기로는 서소문 밖 거리에 한 선비가 살았습니다.”

 

바로 방금 전에 들었던 구절이기도 했다. 턱을 괴고 있던 성보는 몸을 돌려 앉아 승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마치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드는군. 그 선비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성은 박가요 이름은 문수.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라고 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즉시 돌아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태도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성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기이한 우연이로군. 내 이름도 문수에 자는 성보, 호는 기은이오.”

하나면 신경 쓸 것이 없고 둘이면 놀라운 우연이겠지만 어찌 셋이 그러하겠습니까? 바로 선비님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아무래도 이 자는 처음에 우려하던 것처럼 땡중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사람을 속여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악질적인 부류. 성보는 손가락으로 갓의 테두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의 말에는 지금까지 두 가지 정도 이상한 점이 있었소.”

말씀하시지요.”

먼저 이야기 전에 했던 말이오. 나는 이제 막 과거를 치르러 떠나는 중이지. 아직 젊은 선비라면 응당 정승의 자리에 올라 임금을 보필하고 만민을 자족하게 하는 꿈을 꿀 것이고 나 역시 그러한 마음이 있소이다. 하지만 그건 모두 오지 않은 일일 뿐, 나는 당신의 말처럼 어사를 지냈다거나 한 적이 없소. 녹봉을 받았더라면 내 아내도 고생을 지금보다야 덜 했을 것이고.”

먼 미래의 일입니다.”

미래, 미래를 내다본다니 이건 숫제 예언이 아닌가.”

 

성보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예언을 입에 담는 자들은 하나같이 혹세무민하는 자들이지. 그렇기 때문에 적에게 누명을 씌울 때도 자주 사용되는 것이오. 주초위왕(走肖爲王)과 같은 일이 꼭 같지. 다들 그것이 예언이라 말했지만 실제로는 어떠했소? 꿀을 바른 잎을 벌레가 파먹었을 뿐이오. 그리고 그 이후 정암 선생이 어찌 되었는가?”

 

매섭게 승천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태연자약했다. 성보는 말을 이었다.

 

왕이 된다는 예언을 받은 자의 끝이 그러하였으니, 정승이 된다는 예언을 나에게 던지는 저의가 의심스럽군.”

글쎄요. 그건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신시와 같은 거지요. 제대로 알 수 없는. 하지만 선비님이 무언가에 쫓겨 오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 아닙니까?”

 

승천은 그가 묻는 바를 두루뭉술하게 돌릴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지겨움과 짜증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때마침 지적하고 싶었던 부분이었던지라 성보는 참고 말했다.

 

두 번째가 바로 그거요.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시겠소?”

세이 경청하겠습니다.”

여기 갑이란 인물이 있소. 몸이 날래고 체격이 건장하여 가히 장군의 기골을 가졌다고 할 만 하나, 성품이 곧지 못하여 힘을 약자에게만 휘두르니 실로 무뢰배의 표상 같은 놈이었소.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스님처럼 보이는 자가 그에 다가와 말하길 화살이 뚫지 못하는 갑주를 차려입고 그 위에 기괴한 분장을 더하시오. 그리고 한 선비에게 겁을 주어 내쫓게 되면 사례하겠소. 이런 이야기는 어떤지?”

과연. 그것이 선비님이 만나신 요괴의 정체라는 것이군요.”

나라면 요괴가 아니라 다른 분장을 시켰겠지만.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온 중앙황제대장군 같은. 이게 사실이란 뜻은 아니지만, 모르긴 몰라도 요괴의 저주보다는 훨씬 말이 될 테지.”

 

승천은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미래에 있을 법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성보는 승천의 말을 일축하며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이 중과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승천은 깔고 앉은 돌을 끌어 성보를 향해 한 발자국 정도 다가갔다.

 

지금까지의 제 말이 진짜임을 확인할 수 없다 해도, 선비님께는 의문이 아직 남으실 것입니다만.”

무슨 의문 말이오?”

 

무심코 대꾸하고서 성보는 무릎을 쳤다. 말을 섞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찰나 전의 일이거늘 질문을 던지다니 통한의 실수였다.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승천의 말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제가 어떻게 선비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고 있냐는 것입니다.”

 

성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활을 쥐고 화살을 재려 했으니 이미 둘 다 잃어버린 후였다. 그는 쥐고 있던 지팡이를 쥔 채로 승천을 향해 내밀었다. 여차하면 가차 없이 두들길 태세였다. 대화가 끊기고 모닥불 타는 소리만이 숲 안에 남았다.

 

확실히 승천의 말이 맞다. 어설픈 이야기로도 상황을 명확히 상상할 수 있던 이유는 그것들이 실제로 성보가 겪은 일들이기 때문이었다.

 

서지에서 화살을 쏘아 구렁이를 잡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았지. 듣고자 하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을 거요.”

 

성보는 심드렁함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미진한 논리이긴 했다. 왜 자신에 대한 일을 그렇게 수집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 그 정도야 이미 엊저녁에 읽힌 것인가, 승천은 자신을 향한 지팡이 끝을 손가락으로 잡아 옆으로 밀어냈다.

 

다행스럽게도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이에 대해 아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들어 보시겠습니까?”

, 이미 끝난 거 아니었소?”

아직 많이 남았습니다. 앉으시지요.”

 

지금 당장이라도 사이비 중놈을 두들기고 나서 자리를 박차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간신히 찾은 쉴 수 있는 자리는 쉽게 포기하기 어려웠다. 쉼터의 삯을 비싸게 치른다 생각하면서 성보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느 날 제가 길을 가다가 아낙 우는 소리가 구슬피 들려와 발을 옮겼습니다. 낡았지만 잘 정돈된 초가에 도착해 보니 아낙이 한 선비의 몸을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지아비가 10년 과거를 준비했는데 괴질이 들어 생사를 모르겠다 하니, 이 어찌 기구한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처음에 아낙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자신의 아내까지 욕보이려는 셈인가 싶어서 호통을 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치러 떠났고 병에 걸려 쓰러진 적이 없었다. 성보는 눈살을 찌푸린 채로 승천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지니고 있던 돈을 꺼내어 의원을 부르는데 보태 쓰라 했지만 아낙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미 도성의 의원들이 모두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분명 숨이 붙어 있는데 눈을 뜨지 않으니 살아있는 송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은 인간의 도리로 판단할 수 없으니 부처의 도움을 바란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어떤 상태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지라 아낙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신이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의원이 모르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지혜를 쌓고 도를 닦아야 할 것이다. 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니니 나이가 지긋한 고승이기 마련, 아무리 훑어봐도 승천이라는 자는 한창 때의 청년처럼 보였다. 저 늘어지는 듯한 말투만 제외하면 말이다.

 

피골이 상접하고 호흡이 매우 얕으니 확실히 제가 보기에도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낙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과 미음을 입에 축여 넣고, 끊임없이 손발을 주물러 가며 환자를 보살폈습니다. 죽었어야 이치에 맞을 것인데 어찌 아직 죽지 않았는가? 아낙의 정성 말고는 다른 대답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의원들이 아무도 없었다면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만 하오.”

 

고개를 끄덕이는 성보를 보며 승천은 미소를 지었다. 승천과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아 불쾌해졌다. 성보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계속하시오.”

저는 아낙에게 바깥양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물었는데, 아낙의 얼굴에 미약하나마 화색이 돌며 조목조목 설명을 해 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외가 얼마나 상사하는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닌가. 부부란 으레 그러해야지.”

혼례가 인륜의 대사라 하나 사람 사는 모습은 모두 천차만별 아니겠습니까. 으레 그러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살 수 있었다면 분명 운이 좋았던 게지요.”

 

성보는 운()이라는 글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식적으로 멀리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의지하게 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와 다르게 승천은 단어를 거침없이 입에 담았다.

 

운이 나쁘다면 천 년을 수행해도 인간이 덜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천년을 살아본 것 같은 태도로군.”

 

성보의 비아냥거림에 승천은 슬며시 웃을 뿐이었다.

 

이야기가 샜군요. 몸을 자세히 살피니 구렁이의 저주에 침식당해 삼도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밖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저는 아낙에게 선비에게 목소리가 닿을 수 있도록 계속 치성을 올리라 부탁하고 도술을 써서 선비의 꿈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잠깐. 이거 혹시 또…….”

 

아까 들었던 단어들이 나오자 성보가 손을 내밀며 승천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지만 승천은 가볍게 성보의 손을 쳐내며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람의 꿈은 원체 희미한 법이라 과연 안개가 자욱하였습니다. 게다가 선비의 성정을 나타내듯 대나무들이 빼곡하여 숲을 이뤘으니 차마 거기서 사람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구렁이의 저주는 분명 요괴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걸 피해 아직도 살아 있는 거라면 분명 숲 안에 있긴 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또 이 전개인가. 성보는 맥이 빠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저는 주변에 안개를 물리치고 불을 피워 올렸지요. 제가 선비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선비님이 제게로 찾아올 수 있도록.”

이번에도 그 선비가 나요?”

 

승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저는 이야기를 시작했죠. 선비님께서 믿지 않으시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이젠 지금 이 장소가 꿈이라고 우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승천의 얼굴에서 남을 속이려는 기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속이려는 자는 대게 이득을 보고 행동하는 모리배고, 그런 자들은 자신의 얼굴에 드러난 욕망을 쉬이 숨기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간신은 감언을 일삼으며 탐관이 되기 일쑤이지만, 진정으로 대단한 간신은 쓴 말을 마다하지 않으며 청렴을 지키곤 한다. 앞은 나라를 병들게 하지만 뒤는 나라를 팔아먹을 종자인 법이니, 승천에게서 비겁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할지라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성보는 느릿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꿈이 원체 희미하여 안개가 자욱하다 하였소?”

그렇습니다. 안개, 구름, 이러한 것들이 꿈속에서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쟁이들도 꿈을 그릴 때는 보통 그러한 것들을 덧붙여 그리지요. 안견이 견본에 담채로 그렸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처럼 말입니다.”

 

보신 적 있으십니까? 승천의 눈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성보는 고개를 저었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 그 그림말인가. 아쉽게도 직접 본 적은 없소.”

 

저잣거리에 나도는 것은 정교한 위작들뿐이고 진본은 이미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조선팔도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 그런 면에서 승천의 인용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보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개가 꿈으로 이어질 수는 없소. 예로부터 위대한 장수들은 지형지물의 특징을 파악하고 그걸 이용해 기적과도 같은 대승을 이뤄낼 수 있었지. 적벽에서의 대전을 앞두고 있을 때 공명은 동남풍이 불 것을 알고 있었소. 주위 사람들이 보기에는 마치 공명이 도술을 부려 동남풍을 불러온 것처럼 보였지. 하지만 그렇게 보인다는 말은 그렇다는 말과 많은 차이가 있소.”

 

성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터 주위를 옥처럼 괴고 있는 빽빽한 대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손으로 주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숲에 가려 햇빛이 들지 않고 바람이 불지 않아 안개를 흩어놓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보기 어렵소. 그러한 장소라면 오랫동안 안개가 고여 있는 것도 가능할 터, 그러한 상황과 꿈을 구분할 수 있는 요소란 무엇이오? 어떤 사람이 나를 골리기 위해 그런 장소를 세심하게 골라 모는 것, 사실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허황된 소리요?”

 

성보가 질문했으나 승천은 침묵할 뿐이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성보가 단언했다.

 

장황한 이야기였으나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군. 당신의 말은 믿을 수 없소.”

 

길안내를 해 줄 사람을 너무 몰아붙인 것이 아닌지 잠깐 고민이 되었으나, 성보는 굳이 거짓을 꾸며 말을 돌리지 않았다. 휘어질 바엔 부러지는 것이 선비의 삶이다. 많은 선비들이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괜한 기우였다. 승천은 별달리 당황한 기색 없이 입을 열었던 것이다.

 

선비님께서는 뛰어난 식견으로 제 이야기의 이상한 점들을 지적하셨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 예리한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점 말입니다.”

나 자신에게?”

 

성보는 얼떨결에 되물었다.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른다는 말만큼 공부하는 자에게 모욕이 되는 말이 있으랴. 잔뜩 찌푸린 인상이 마치 인왕의 그것과 같았다. 승천은 위축되지 않았다.

 

선비님은 저를 처음 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숲에서 며칠째 길을 잃었고, 처음으로 쉴만한 곳을 찾으셨다고요. 이 숲에는 보시다시피 높게 솟은 대나무와 안개밖에 없습니다. 선비님은 며칠째 먹지도 마시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돌아다닐 수 있습니까?”

그건…….”

 

바로 반박하려 했으나 곧장 말문이 막혔다. 승천은 입을 다문 성보를 향해 말했다.

 

가능한지 그 여부를 따지는 것이 선비님의 방법론이셨습니다. 역사를 막연히 되새겨 보아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영웅들의 일화가 많으니 선비님이 그러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남인 제가 정확하게 짚을 수 없는 부분이겠지요. 그러니 선비님께 묻겠습니다.”

 

눈동자가 더욱 날카로워진 것만 같았다. 성보는 주먹을 꾹 쥔 채로 승천의 질문을 기다렸다. 칼날을 받아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계속 걸었다는 건, 정말로 쉼 없이 걷기만 하셨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승천의 말 대로였다. 그가 지적하기 전까지 성보는 한 번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힘을 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의 몸은 지금도 가뿐했고, 허기와 졸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며칠을 그렇게 보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상태이며 다른 누군가가 꾸며낼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성보는 신음하며 무언가 다른 가능성이 있는지 찾아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인간의 몸을 그렇게 유지할 방도가 있었다면 그 누가 기근을 두려워할 것인가. 하지만 올해도 보릿고개는 어김없이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렸고, 그들 중 누군가는 살아남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성보는 승천과 눈을 맞추었다. 누렇게 뜬 눈이 보였다. 탁한 눈자위와는 다르게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고 안색 역시 평화로워 무언가를 꾸며내는 기색이 없었다.

 

한참 동안이나 승천을 살피던 성보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아는 바에서는 승천의 태도에서 다른 무언가를 찾아낼 수 없었다.

 

꿈이라……꿈이란 말인가. 이렇게나 생생한 것이?”

 

성보는 한탄하며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뻗어 땅의 흙을 한 줌 쥐어보았다. 차갑고 눅눅한 흙의 감촉이 놀랄 만치 생생하게 느껴졌다. 도저히 한낱 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꿈속에 들어와 있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깨어나시면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말겠지요. 마치 안개라도 낀 것처럼 말입니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그 목소리가 다소 얄밉게 느껴졌다. 성보는 살짝 언성을 높여 말했다.

 

그렇다면 역시 신시라는 건 어떻지? 그건 뭐요?”

그 존재 자체야 물론 거짓입니다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설명이 나올지 궁금함을 참기가 어렵군. 설명을 부탁하오.”

원래 죽었어야 할 선비님을 이승에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은 지어미의 기원입니다. 덕분에 의식을 가진 채로 꿈을 떠돌게 되었으니 이곳에 계실수록 공부가 자연스레 정리되어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신시의 정체. 학문을 꾸준히 닦아온 자에게 찾아오는 작은 행운 같은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던 구절을 갑작스레 깨우치는 건 그도 몇 번 경험해본 바가 있었다. 그러한 경험이 크게 와전된 것이라면 신시라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성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더 있다면 신시를 얻을 수 있다는 거로군.”

칠 주야를 더 방랑한다면 반드시 그러한 경지에 오르실 겁니다.”

신시를 얻으면 나는 어떻게 될 것 같소?”

제게 미래를 물으십니까?”

 

승천의 질문에 성보는 뺨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승천은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벼슬길에 올라 별견어사 직을 훌륭히 수행하여 그 명성이 드높아지실 것이고, 마침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르시겠지요.”

처음에는 추서된다고 하지 않았소?”

제가 어찌 미래의 일을 알겠습니까? 그저 사람을 보고 그 정도의 인물이라는 나름의 추측을 할 뿐이지요.”

이 사람, 농도 걸 줄 아는군.”

 

아부성이 다분한 승천의 말을 들으며 성보는 헛웃음을 흘렸다. 웃음을 멈춘 성보는 재차 물어야 할 것을 물었다.

 

만약 신시를 얻게 된다면…….”

 

질문은 중간에 끊겼다. 승천은 이해한다는 것처럼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씀하시지요.”

집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요?”

 

승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굳게 다문 입이 살짝 열리고, 탄성과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막힘없이 말을 이어가던 모습과는 다르게 승천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짐작이 가는 바는 있소. 기탄없이 말해주시오.”

 

성보의 재촉에도 승천은 마음을 잡지 못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도 이내 다시 닫혀버리고는 했다. 성보는 참을성 있게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말없이 넘어갈 수 없음을 그 태도에서 짐작한 것인지, 승천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타는 마음이 깊으니…….”

 

시구를 읊는 듯한 목소리였다. 승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이 있어야 할 자리를 바라보았다. 성보도 따라서 위를 보았다. 희뿌연 안개 너머로 댓잎만이 가득했다.

 

여름날의 하룻밤조차, 누구에게는 천년과 같은 기다림일 수도 있겠지요.”

 

성보는 다시 고개를 내렸다. 탈속한 것처럼 보이던 승천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한, 많은 것들이 뒤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처음 아내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랐다.

 

결심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느 쪽이 보다 중한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길을 가르쳐 준다 했었지.”

그랬지요.”

 

이야기를 들어주건 말건, 애초에 승천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성보를 깨우기 위해서였다. 단지 그 시점이 언제냐 하는 문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성보는 선택했다.

 

나는 아내에게 돌아가겠소. 지금 당장 나가는 방법을 알려 주시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건 돌아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운명이 크게 바뀔지도 모르지요.”

 

확인하는 듯한 질문이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보는 대답 대신 다시 질문했다.

 

무슨 운명이오?”

보다 훌륭한, 보다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 말입니다.”

이를테면 정승 같은? 하하하.”

 

성보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승천은 웃음 뒤에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떠나 개인의 영달을 이룬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리 하여 정승이 된다면, 그건 분명 개 같은 정승 놈일 게 아닌가.”

 

승천은 말없이 성보를 바라보았다. 성보의 결심은 단호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걸 알았는지, 승천은 품속에서 단도를 꺼내 목에 걸고 있던 명주실을 끊었다. 단도를 다시 수납한 후 그는 꿰어 있던 보주를 풀어내서 성보의 손에 쥐어주었다.

 

선비님의 뜻이 얼마나 굳건한지 알 수 있겠습니다. 받으시지요.”

 

생각보다 차가운 체온에 놀라며 성보는 구슬을 꽉 쥐었다. 희미한 노란색 빛이 흘러나왔다.

 

이건?”

미약하나마나 용의 기운을 담고 있는 구슬입니다. 이 구슬이 안개를 뚫고 길을 알려줄 것입니다.”

 

성보는 들고 있는 구슬을 공터 바깥쪽을 향해 내밀어 보았다. 승천이 말한 것처럼 과연 안개가 갈라졌다. 내심 감탄하며 그는 두 개의 구슬을 양 손에 한 개씩 나누었다.

 

그 사이 승천은 지팡이로 땅을 한 번 두드렸다. 동시에 둘 사이에 피워져 있던 모닥불이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이제 공터에 남아있는 빛이라곤 구슬의 빛뿐이었다. 축객령과 같은 그 행동에 성보는 급히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현실에서 당신은 내 앞에 있는 것이 되는데.”

맞습니다.”

며칠 기거하실 수 있겠소? 깨어나면 보답을 하고 싶군.”

 

승천은 말없이 웃었다.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싶어 성보는 급히 덧붙였다.

 

희롱하려는 것이 아니요. 나는 은혜를 잊지 않소.”

은혜라. 둘이 있는데 어떤 관계가 일방적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선비님과 나눴던 문답. 그것이야말로 제가 근래 궁구하던 문제에 대한 한 가지 답이었으니 은혜를 입은 쪽을 짚으라 하면 분명 저일 것입니다.”

 

승천은 허리를 깊게 숙여 성보에게 인사를 올렸다. 성보는 당황하며 합장한 채로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한동안 서로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승천이 허리를 펴고 말했다.

 

이후로는 저도, 선비님도 이제 갈라져 먼 길을 떠나겠지요. 방향은 같을 수 있으나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군. 그것이 불교의 인연이오?”

불교라. 잘 모르는 일이군요. 그러니 자연의 이치라 말해야겠지요.”

 

중이 불교를 잘 모른다고? 성보는 무언가 말을 더 하려 했다. 그 때 쥐고 있는 구슬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안개를 갈랐다. 모든 꿈이 그러한 것처럼, 불현듯 꿈이 끝났다.

 

 

 

승천은 눈을 떴다.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인지 멀리서 우레 소리가 울렸다. 승천이 성보의 대답을 들었을 때부터 몰려온 것이리라. 그런 와중에도 지어미가 정화수를 떠놓고 올리는 치성 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부부의 연이 무엇이기에 저리 정성을 드리는가. 무엇이기에 자신을 얽매는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제대로 벗지도 못한 것이었다. 승천은 화살에 맞아 죽은 그의 아내를 떠올렸다.

 

사사로이 아내의 복수를 한다면 승천하기 위한 천 년의 수행이 깨지는 것은 물론, 응당한 천벌을 받게 될 것이다. 굶주린 자는 먹으려 했고 죽인 자는 동족의 아기를 지키려 했으니 이는 정당한 생명의 다툼에 가까웠다. 원한이 끼어들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이치로 납득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저주를 토하고 죽어간 아내의 기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서소문의 요괴들이 앞다투어 그에게 찾아와 아내의 죽음을 전하였다. 똑같은 소식을 반복해서 받을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점점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승천은 답을 찾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그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단 한 명을 만나기 위해서.

 

우레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간의 허물을 벗었다.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지고 눈은 노랗게 물들었다. 돋아나기 시작한 나무껍질색 비늘이 이내 사지를 감싸 하나로 덮었다. 마침내 구렁이 한 마리가 방 안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승천은 혀를 날름거리며 아직 깨어나지 못한 성보를 내려다보았다. 끝내 여의주가 되지 못한 보주 두 개가 머리맡에서 희미한 빛을 냈다. 성보가 낸 답은 승천의 답이기도 했다. 그는 아내를 택했다.

 

승천은 입을 크게 벌렸다.





20차 판타지 갤러리 단편대회 출품작

http://fangal.org/index.php?document_srl=584625

대마
단편/그 외 2015. 6. 1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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