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天日䤳畵)

1.

  

  거울로 만들어진 방 안 한가운데에는 왕이 앉아 있었다.

  

  사람들에게 있어 왕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 독을 먹어도 죽지 않고 피부에 칼날도 박히지 않는 존재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오래 살아온 왕의 가장 큰 특징은 눈이었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명을 죽이거나 파괴해 버리는 마법 같은 힘이 깃들어 있었다.

  

  한 때 몇몇 인간을 사랑했던 왕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눈에 두건을 둘렀다. 그리고 필요할 때만 두건을 벗고 눈을 뜨고는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왕의 시선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세월이 흐르고 왕은 스스로 지배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람들을 다스리는 일이 굉장히 지루하고 피로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통치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대신 왕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매년 네 명, 자신의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눌 사람을 뽑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왕이 지배자건 아니건 어차피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을 감춘 채 거기에 복종했다. 그렇게 해서 왕의 건전한 취미 생활이 시작되었다.

  

  “올해 내 앞에 선 것은 그대가 네 번째다.”

  

  노인은 고개를 조아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왕은 기대한 반응이 나오지 않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턱을 괸 채로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째는 도박사였다. 그는 코앞의 상대를 속이던 자였다. 그는 나에게 여섯 장의 카드를 순식간에 없애 보이겠노라 했다. 나는 성냥도 할 수 있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속지 않았다.”

  

  올해의 네 명으로 뽑혀 한 방에 갇힌 그들에게 왕은 과제를 제시했다. 바로 자신을 제대로 속여 넘길 수 있다면 그 자를 살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주어진 기간은 하루.

  

  “두 번째는 사업가였다. 그는 백 명의 투자자를 속이던 자였다. 그는 나에게 제국의 재정을 두 배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쓰레기가 두 배로 쌓여봤자 피곤할 뿐이기에 속지 않았다.”

  

  앞선 세 명은 자신의 특기를 살려 왕을 속일 방법을 고민했다. 책을 읽으며 간간히 그들을 관찰하던 노인은 세 명의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세 번째는 배우였다. 그는 만 명의 청중을 속이던 자였다. 그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에 속지 않았다.”

  

  노인은 방을 나간 다른 세 명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왕의 말로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왕은 나른한 표정으로 노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다보니 그대가 퍽이나 기대가 되는구나. 너는 교수라는 직함으로 이 나라 전체를 속이던 자였지.”

  

  왕은 눈을 가리고 있는 고동색 천을 매만졌다. 매끄러운 천과 그 너머에 있는 안구의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왕은 자신의 눈을 살짝 누르며 말했다.

  

  “나를 속일 수 있다면 살려 주도록 하마.”

  

  노인은 엎드려서 왕의 표정을 상상해보려 했다. 하지만 얼굴의 절반이 가려진 사람의 표정을 추측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침을 삼켰다. 떨리는 손가락의 감각을 떠올리려 애쓰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저는 거짓말에는 별다른 재주가 없습니다.”

  

  왕은 웃었다. 노인은 과거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듣던 사람이었다. 그가 강연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다. 일주일간의 강연이 모두 끝난 후, 구름처럼 몰려들었던 청중들은 자신들이 속았음을 깨닫고 분개했고 그를 그랜드 마스터로 초빙했던 국립과학협회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바로 노인을 내쫓았다. 30년도 더 지난 옛날의 일이었지만 아직도 몇몇 사람들은 나라를 속였던 허풍선이의 사기극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도 그랬다.

  

  “그대는 앞선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속였다. 그렇지 않은가?”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죠.”

  

  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왕이라는 전설적인 존재를 실재로 마주한 긴장감이 조금씩 완화되어 가고 있었다. 분명 그보다 더 불쾌한 과거의 기억 때문이리라. 노인은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그러니 저는 거짓말이 아닌 제안을 드리려 합니다.”

  “재미없군.”

  

  왕의 반응은 차가웠다. 노인은 급히 말을 더했다.

  

  “폐하의 눈을 뜨게 해 드리겠습니다.”

  “식상하기까지 해.”

  

  왕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매년 네 명, 그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던 자의 숫자가 벌써 백을 넘어갔다. 개 중에서 왕의 시력을 돌려주겠노라고 말하는 자는 절반이 넘었다. 물론 그들 중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모두들 다양한 사형방법을 고안하기 위한 실험의 일부가 되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이 자리에 부르셨고, 저는 올해의 마지막입니다. 이 뒤론 아무도 없죠. 그러니 적어도 제게 설명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건 네 말이 맞다. 지껄여 보도록.”

  

  노인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예전 교단에 서서 강연을 할 때를 떠올렸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최대한 말을 고르던 그 날을. 그 때는 언제나 처음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머리를 싸매곤 했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은 무의미한 노력이었지만. 노인은 숨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비웠다.

  

  “저는 네 명의 일원으로 뽑혀 이 왕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책을 읽었습니다. 폐하의 힘에 대한 기록을 제대로 알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결론을 말하려 합니다.”

  

  노인에게는 앞선 세 사람과 같은 능력이 없었다. 카드를 숨기는 손재주도, 다른 사람들의 돈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언변도, 타인의 감정에 건드리는 연기력도 없었다. 그가 할 줄 아는 건 관찰하는 것, 가설을 세우는 것, 가설을 검증하는 것 정도였다. 이번 경우에는 관찰 대상에 미리 접근할 방도가 없었고, 그래서 타인의 기록으로 관찰을 대체해야만 했다. 그게 좀 불안한 요소였다. 노인은 침을 삼켰다. 

  

  “예시를 하나 들겠습니다. 흡혈귀라는 종족이 있습니다. 이들은 보통 불사한다고 말해질 정도로 오랜 수명을 누리고, 빛에 지극히 민감한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통 사람들은 갖추지 못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기능을 유지하게 해 주는 것은 정기적인 흡혈입니다.”

  “여기를 보라.”

  

  노인이 고개를 들자, 왕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접었다.

  

  “지루한 서두를 줄이도록.”

  “……폐하의 몸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십니다. 그것도 굉장한 일을 말이죠.”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왕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이러한 기능이 어떻게 해서 구현된 것인지 그 원리를 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건 단 하나, 시스템의 출력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입력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흡혈귀의 흡혈과 같은 입력 말입니다. 그리고 폐하의 몸은 일반적인 인간이 하는 것 이외의 에너지 교환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입력은 폐하의 내부에 있을 것입니다.”

  

  왕이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유한한 질량 안에 무한한 에너지가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므로, 그 밀도가 높긴 하겠지만 분명 한계가 존재하리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능력을 사용하실 때마다 이 내부의 유한한 에너지를 끌어와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합니다. 능력을 계속 쓰시게 되면 결국 그 에너지는 고갈될 것이 자명한 이치.”

  

  왕이 아까 전보다 살짝 빠르게 네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그에 맞추어 노인의 말은 더욱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힘을 모두 써서 버리시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며살아가실수있게될검다!” 

  

  다섯 번째 손가락이 접히기 직전, 노인의 말이 끝났다. 왕은 입맛을 다시며 접었던 손가락을 모두 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자신이 이해한 내용에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 되짚어 보았다. 

  

  “네 말이 꽤나 우습구나. 내가 당장 이 안대를 벗고 너희에게 재앙의 기적을 보이란 말이냐? 이 힘이 지쳐 다할 때까지? 그래서 뭐가 남아나겠느냐?”

  

  왕은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을 그 눈으로 죽여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태까지 뭐가 변하는 듯한 낌새는 없었다. 노인의 말이 맞다 쳐도 이 에너지를 다 쓰기 위해서 인류를 멸망시켜야 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시고 계십니다.”

  

  비웃음이 담긴 듯한 그 말에 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태어나서 이 힘을 가지게 된 이후로 저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제가 그랜드 마스터였을 때, 저는 서로 떨어져 있는 두 지점의 그림자를 이용해 이 세계의 크기를 추측한 바가 있습니다.”

  

  평행하는 빛에 의해 만들어진 각도의 차이와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이용해 원주를 계산하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 때의 계산 결과를 생각하며 노인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달을 이용해 세계와 태양과의 거리를 계산해 본 바가 있습니다. 폐하, 태양까지 가는데 이 대륙이 몇 개 필요할 거라 생각하시는지요.”

  “모르겠구나. 그대는 아는가?”

  “저도 모릅니다.”

  

  왕은 잠시 말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두건을 풀고 노인을 바라보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그런 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의 말은 계속했다.

  

  “제겐 계산 결과를 적을 만한 종이가 충분치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말은 허풍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렇기에 왕은 조금 더 인내심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종이도 사지 못한다는 너의 가난함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

  “중요한 것은 수없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인류를 멸망시킬 것을 걱정하십니까? 태양은 인류 전체보다도 더 먼 곳에 있습니다.”

  

  아무리 초월적인 힘을 가졌다 한들, 그게 인간의 몸에 담겨 있는 이상 우주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거기는 숫자를 읽는 단위가 완전히 달랐다. 빛의 속도로 거리를 읽는 세계.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은 태양보다도 아득히 먼 곳에 있지요. 제가 그들의 빛을 모아 폐하의 앞에 바치겠습니다. 폐하는 그들을 바라보시면 될 뿐입니다. 재앙은 어디에도 미치지 않고 폐하의 힘은 모두 소모될 것입니다.”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의 별을 죽이십시오. 그 결과 폐하는 오랫동안 잃어버리셨던 시력을 되찾으시게 될 겁니다.”

  “겨우 망원경 따위로?”

  “제가 만들 물건은 망원경과는 규모 자체가 다릅니다. 어찌 한 잔의 물과 바다를 같다 하겠습니까?”

  

  한 분야의 정점에 이른 자의 자신감이 노인 안에서 완전히 되살아났다. 노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 기구의 이름은 천일야라고 합니다. 제게 그걸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2.

  

  취직할 당시에 흡혈귀라는 종족적 특성을 잘 살린 그는 면접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그 후 별다른 문제없이 주위의 신뢰를 얻으며 야간 경비대에 재직한 지 35년, 마침내 경비대장의 자리와 평생 연금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왕의 명령이 날아왔다. 어떤 노인의 작업에 전폭적으로 협조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로 해고당했다. 

  

  당사자를 만나면 어떻게든 따지고 들 생각이었다. 왕에게 따질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등이 굽고 치렁치렁한 수염을 기른 노인을 보자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특히나 깡마른 발목에 액세서리로 방울 달린 족쇄를 차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 미묘한 죄책감 때문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노인의 일을 열심히 도와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넘었다. 다행이라고 할까, 일은 단지 피를 뽑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흡혈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사바늘을 자신의 팔뚝에 꽂았다.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펴자 바늘에 연결된 튜브로부터 붉은색 피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것과 무엇 하나 다르지 않은 색이었다. 

  

  흡혈귀는 멍하니 튜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아온 피의 양이 슬슬 노인이 말했던 감광제라는 걸 넉넉히 만들 정도의 양에 도달해 있었다. 일이 모두 끝나게 되면 노인은 왕을 만나러 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노인과 그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 동안의 협업으로 괴팍한 노인에게 나름 호감을 쌓아온 흡혈귀는 오랫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질문을 불쑥 꺼냈다.

  

  “당신이 작년의 네 번째라는 소리를 들었는데요.”

  

  말하자마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옆면이 열린 경통 내부에 임시로 설치한 감광 막대를 통해서 거울에 떨어지는 빛들의 초점거리를 계산하고 있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코에 걸친 안경이 슬며시 흘러내렸다. 노인은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래서?”

  “진짭니까?”

  

  노인은 펜을 내려놓고 킬킬거렸다. 몸이 흔들리며 족쇄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난 반년간의 경험으로 노인이 대답을 하기 싫을 때 웃음으로 넘기려고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대답은 대부분 긍정이었다.

  

  “진짜군요.”

  

  흡혈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매년 왕이 벌이는 기행은 너무나 유명해서 나라 안에서 모르는 자가 없었다. 누구도 뭐라 할 수 있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되뇌며 살아갈 뿐. 나라 전체에서 네 명이라는 것은 죄책감을 가지기에는 꽤나 부족한 숫자였다. 

  

  하지만 당사자와 반년쯤 같이 일하다 보면 느낌이 달라지는 법이다. 그 동안 혼자서 추측만 한 부분이 진짜로 확인되자 마치 죽은 사람이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흡혈귀는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살 수 있었죠?”

  

  왕에게 불려간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눈앞의 이 노인을 제외하고서는. 하지만 노인은 웃음을 멈추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참을 뭔가 고민하던 노인이 흡혈귀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예를 들어보지. 흡혈귀는 불사인가?”

  “그렇죠.”

  “하지만 폐하가 바라보면 죽지.”

  

  흡혈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눈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왕은 두건을 푸는 것만으로도 반란군이 이끌고 온 코끼리 부대 하나를 단숨에 살해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왕이 반란군을 모두 죽이는데 걸린 시간보다 풀어낸 두건을 다시 묶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적혀 있었다.

  

  “죽지 아니하기에 이를 불사라 하지. 하지만 죽잖아? 그럼 불사가 아닌 거지.”

  “아……, 네”

  

  흡혈귀는 떨떠름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의 불만에 취해 흡혈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자네는 자네의 불사성이라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불사의 생명이라는 것은 영구 기관과 같은 개념의 존재네. 이론적으로조차 말이 안 돼. 자네는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인데 말이야. 지금 살아있다는 것이 내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증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불사라고 해도 좋겠지.”

  “제가 그 단어를 처음 쓰자고 정한 것도 아닌데 저한테 그렇게 따지셔도 말이죠.”

  

  흡혈귀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노인은 여전히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 자네랑 같지. 그러니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으리란 사실을 잘 알았나?”

  “아, 예.”

  

  흡혈귀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노인은 만족한 듯 다시 펜을 들었다. 혀를 내밀어 펜촉에 침을 묻히고 다시 계산을 시작하려는 찰나, 흡혈귀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오신 건지 얘기해 주시면 안 됩니까?”

  “……집요하군.”

  “혹시라도 더 이상 못 만나게 되면 다시는 들을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미래를 의심하며 사는 건 좋은 태도지.”

  

  노인은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흡혈귀의 태도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종이 위에 의미 없는 낙서를 끼적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폐하한테 이 기구를 만들겠다고 했네. 그리고 완성할 때까지만 생명을 유예해 달라고 간청했지. 다행스럽게도 폐하는 나의 청을 들어주셨고 말이야.”

  “이 기구가 뭔데요? 망원경 아닙니까?”

  “멍청하긴. 끝이 중간에 비해 뾰족하다고 해서 바늘과 발리스타가 같나?”

  

  노인은 코를 씰룩이며 펜을 들고 있는 손으로 몇 번이고 삿대질을 했다. 발리스타라는 걸 본 적이 없는 흡혈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였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괴팍한 노인네가 순순히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얌전한 그의 태도에 노인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건 폐하의 힘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이 있는 기구야. 이름은 천일야(天日䤳)라고 붙였네.”

  “망원……천일야가 어떻게 폐하의 힘을 없앱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폐하의 힘을 안전하게 쏟아 부울 수 있도록 굉장히 먼 지점에 있는 무언가를 관측할 수 있게 해주는 기구지.”

  “정말 간단하군요. 겨우 그런 걸로 됩니까?”

  “나도 잘 몰라. 확인해 본 적이 없으니까.”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왕에게 했던 제안은 그의 추측을 기반으로 한 것일 뿐, 어떤 정밀한 계산의 결과나 엄밀한 실험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확인해 보려는 거기도 하고. 가능성만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폐하도 내 제안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렇다면 좋은 일이겠는데요.”

  

  노인은 흡혈귀의 안이한 말에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왕은 앞을 보고 싶어 하니까 말이야.”

  

  노인이 말한 왕이라는 단어는 무척이나 생소하게 들렸다. 마치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흡혈귀는 반 박자 늦게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위에 노인의 말을 들은 다른 사람이 있는지를 살폈다. 다행히 그들뿐이었다. 노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흡혈귀를 비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걸 완성하기 전까지는 폐하가 나를 죽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그럼 최대한 천천히 만드는 게 낫지 않습니까?”

  

  흡혈귀는 멍한 눈으로 천문대 안에 놓여 있는 거대 망원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던 망원경이라는 것은 몇 개의 렌즈를 겹쳐 만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건 특이하게도 거대한 쌍곡선 형태의 곡면을 지닌 거울을 기반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경통을 향해 떨어진 빛은 먼저 가장 위의 대물렌즈를 통과하게 된다. 이 렌즈는 중심축과의 거리에 따른 초점거리의 변화를 보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렌즈를 통과한 빛은 아래에 있는 거울을 향해 나아간다.

  

  가장 밑에 있는 주 거울은 내려온 빛을 모아 가운데에 설치된 부 거울로 보내고, 거기서 반사되어 외부로 나온 빛이 몇 개의 렌즈를 거쳐 접안렌즈에 도립 실상을 출력하게 된다. 뒤집힌 상이라고 해서 별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왕이 이걸로 보게 될 건 별이었으니까.

  

  중요한 건 깨끗하고 확실하게 보이느냐는 것이었다. 그 단순한 목적을 위해 건물 하나를 통째로 써야 했을 정도로 이 망원경은 컸다. 노인이 장담하기를 우주의 별까지도 똑똑히 바라볼 수 있는 물건이 될 거라 했지만 흡혈귀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흡혈귀가 아는 건 이런 큰 물건은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과, 실무자가 아닌 한 완성이 되지 못한 건지 완성을 안 한 건지 구분하기란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랜 경비대 생활이 그에게 준 지혜였다.

  

  “글쎄. 폐하가 그렇게 한없이 기다릴 거라 생각하나?”

  

  하지만 노인은 피식 웃으며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건 그렇군요.”

  “반 년 정도 더 살았으면 충분히 성공인 거지.”

  

  확실히 그랬다. 원래대로라면 작년의 네 번째였던 노인은 반년 전에 죽었어야 했다. 살아있을 리 없었던 목숨이라고 생각하면 딱히 삶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 같은 저 태도도 그럭저럭 이해가 갔다.

  

  그 때 저울 위에 올라가 있던 혈액 팩이 미리 세워둔 눈금 아래로 내려가며 밑에 있던 방울을 울렸다. 정해진 양을 다 채웠다는 신호였다.

  

  흡혈귀는 재빠르게 바늘을 팔에서 뽑았다. 흡혈귀인 그에게 피는 귀중한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수분을 보충한다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흡혈귀를 바라보던 노인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열린 경통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중간 중간 설치된 수많은 렌즈들과 거울들이 빛을 반사해 반짝거렸다. 노인은 그 빛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도 이걸로 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말이야.”

  

  

  

  3.

  

  그 해의 가을이 오자 왕은 말했다.

  

  “더 이상 기다려 줄 수가 없구나.”

  

  왕의 그 말과 함께 흡혈귀와 노인의 작업은 끝이 났다. 완성 자체야 진즉에 된 상태라 노인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헤어지기 전, 흡혈귀는 야간 경비대 복귀 명령서를 한 손에 쥔 채로 노인을 꽉 껴안았다. 노인은 헛짓거리라고 생각했지만 흡혈귀가 내킬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늙어서 힘이 없었다.

  

  왕이 찾아온 날, 밤의 천문대는 어두컴컴했다. 커다란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망원경 옆으로는 눈을 가져다 댈 수 있는 접안렌즈가 비죽 튀어나와 있었고 그 앞은 왕이 편안하게 별을 바라볼 수 있도록 푹신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왕은 망원경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건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니 보일 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향만은 정확했다. 왕은 물었다.

  

  “얼마쯤 바라봐야 하는가?”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폐하의 힘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자면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질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 부분은 왕도 익히 알고 있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없어 보이는 노인을 밀치며 말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비켜라.”

  

  노인은 왕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뒤로 물러났다. 왕이 보지 못하는 그 얼굴에 경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노인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고, 왕 역시 그런 사실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노인은 그 많은 사람들이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 해 볼 예정이었다. 그가 만들어낸 이 천일야를 통해서.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 왕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통해 왕이 어디에 서 있는지 상상해보려 애썼다. 평생 동안 앞을 보지 못한 채 살아온 왕과 다르게 노인은 소리에서 아무런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노인이 아는 것은 오로지 빛뿐이었다. 빛은 평생을 함께 해 온 동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빛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 국립과학협회의 그랜드 마스터 중 하나로 초빙되어 갔을 때, 그는 드디어 자신의 지식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명예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빛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자였고, 그를 증명하는 많은 객관적인 증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강의를 시작했을 때부터 상황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너무나 달랐고, 노인이 아무리 적절한 언어를 선택해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려 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인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평생을 쌓아온 명성이 흩어지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일 년. 그의 지식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건만 노인은 모든 것을 잃고 협회를 떠났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에 대한 부정만을 반복해서 마주했던 노인은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자신은 무지했고, 세상은 의심스러운 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왕이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 역시 믿지 않았다. 그 명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정이 불가능한 진리였지만 노인은 이미 진리가 부정당하는 경험을 숱하게 겪어 왔다. 그건 딱히 이상한 일도 드문 일도 아니었다.

  

  왕이 두 손을 올렸다. 오랫동안 사람에게 명령을 내려온 경험 덕분인지 그런 단순한 동작에도 위엄이 느껴졌다. 묶여 있던 두건을 풀었다. 갈색의 천이 천문대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왕은 눈을 감은 채로 정확하게 노인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눈을 떠도 되겠느냐?”

  “손을 뻗어 보십시오.”

  

  왕은 손을 내밀었다. 그의 두 손에 접안렌즈가 스쳐 지나갔다. 노인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방금 만지신 부분이 눈을 대는 곳입니다. 거기에 눈을 대고 바라보신다면 별이 보일 것입니다. 부드러운 천을 덧대 놓았으니 오래 보시더라도 아프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별이라…….”

  

  왕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아 접안렌즈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눈을 떴다. 왕의 눈은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없이 별의 빛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왕이 짧게 탄성을 흘렸다. 새까만 배경, 동그란 하늘 안에 백광의 별이 보이고 있었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안개를 휘감은 하얀 별이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하지 않고 무척 안녕했고, 왕이 보고 있는 별 역시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천일야는 아무런 이상 없이 왕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적어도 노인이 만들어낸 이 물건이 엉터리는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왕은 살짝 감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놀라운 망원경을 만들었군.”

  “망원경이 아닙니다. 천일야라 하지요.”

  “무엇이 다른가?”

  “하늘에 뜬 별을 가리켜 이를 천일(天日)이라 하고, 밤에도 그 별의 빛을 모으는 거울이 있어 이를 야(䤳)라 합니다. 망원경에는 거울을 쓰지 않지요.”

  

  정확한 설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노인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가 최선을 다해 설명을 하면 그 설명을 들은 왕은 분명 잘못된 개념을 쌓게 될 것이다. 노인에게 배운 자들은 모두 그랬다. 어차피 결과가 동일하다면 거기에 더 시간이나 노력을 쏟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거울 망원경이라고 하자꾸나.”

  

  왕의 말에 노인은 혀를 찼다. 그런 노인의 태도를 등 뒤로 느낀 왕은 빙긋 웃었다. 이 노인은 자신의 앞에 선다고 해서 위축되지 않았다. 재미있는 존재였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별은 잘 보이십니까?”

  “그래, 옛날 하늘에서 보던 것보다 크구나.”

  

  왕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왕은 마치 별을 만지려는 듯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갈퀴처럼 펼쳐진 손가락이 허공을 갈랐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상상했던 것보다 작다.”

  “별의 크기를 인간이 체감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가까이 가면 볼 수가 없으니까요. 많은 것들이 그렇죠.”

  

  왕은 노인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들으며 눈에 보이는 별의 모습에 집중했다. 노인도 더 이상 왕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한 시간이 좀 지났을까, 계속 별을 들여다보고 있던 왕이 불쑥 물었다. 지루한 기색이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지?”

  “저도 모릅니다.”

  “미리 말해두겠다만, 성공한다면 너를 살려줄 것이다. 실패할 경우는 알아서 상상하도록 해라.”

  

  불만이 가득한 왕의 말에 노인은 실소를 지었다. 그는 처음과는 달라진 왕의 말을 지적하고 나섰다.

  

  “처음엔 폐하를 속여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랬지.”

  “어쨌든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겁니다. 거짓말에는 재주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노인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벗었다. 줄 끝에 걸린 삼각기둥 모양의 프리즘이 옷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프리즘을 조심스럽게 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족쇄에 달린 방울이 딸랑거렸다.

  

  “시끄럽구나. 정신이 사나우니 가만히 있거라.”

  

  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스레 되받았다.

  

  “지루하신 것 같아 잠시 다른 걸 보여드릴까 합니다만.”

  “무엇을?”

  “그림입니다.”

  “그림?”

  

  왕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노인은 경통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왕은 더 이상 방울 소리를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다.

  

  “하늘에 뜬 별을 가리켜 이를 천일(天日), 밤에도 그 별의 빛을 모으는 거울이 있어 이를 야(䤳), 그리고 이 둘이 만나 하나의 그림을 그리니 이를 화(畵)라 합니다.”

  “자네 식으로 말하면 천일야화겠군.”

  

  왕의 농담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뇨. 그 그림이 진짜와 다를 바가 없어서, 이를 사진(寫眞)이라 합니다.”

  

  노인의 주름살 진 손이 레버를 당기자 경통의 옆면이 천천히 열렸다. 거울과 렌즈가 설치된 중간의 지지대에는 투명한 관이 하나 연결되어 있었다. 노인은 침착하게 그 관 안에 프리즘을 꽂았다. 

  

  빛이 길을 선택하는 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은 처음부터 천일야 내부에 두 개의 경로를 짜 넣었다. 두 개의 경로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고, 최초에는 오로지 첫 번째 경로만 쓰일 뿐이었다.

  

  하지만 경통이 열리고 중간의 초점 부분에 한 개의 프리즘이 끼워지자 상황은 달라졌다. 첫 번째 경로를 지나던 별의 빛은 굴절되어 두 번째 경로로 방향을 틀었다. 열린 경통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간 빛은 천문대 전체를 비췄다. 건물 내부를 한 차례 휩쓴 별빛은 다시 중앙에 설치된 부 거울을 향해 모였다.

  

  왕이 바라보던 하얀 별 위로 무언가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처음엔 불길이라고 생각했다. 왕이 아는 한 별은 빛을 내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붉은 액체가 급속도로 변색하기 시작하자 왕은 그게 별의 불꽃이 아닌 무언가 이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의 말이 먼저였다. 

  

  “흡혈귀의 피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빛에 민감한 물질이었습니다. 감광제로 쓰기엔 최고였지요.”

  

  다채롭게 변색된 피는 완전히 하얀 별을 덮어 씌웠다. 더 이상 별이 보이지 않는 시야에 새로운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딘가 들었던 적이 있는 풍경이었다. 중간 부분이 개방되어 있는 거대한 경통의 일부, 거기에 손을 대고 있는 한 노인, 그 옆에 놓여 있는 의자, 그리고 왕관을 쓴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사람. 

  

  왕의 눈이 왕을 바라보았다. 

  

  

  4.

  

  한 때 이 폐허에는 천일야라 불리는 망원경이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이었지만, 누군가 처음으로 사용한 직후에 파괴되어 버렸기에 그걸 아는 자는 꽤나 드물었다.

  

  흡혈귀는 과거 천문대였던 건물 안을 걸어 벽에 걸어놓은 사진기 앞에 섰다. 길게 줄로 연장해 놓은 플래시 스위치를 당겨 손에 쥐었다. 딱히 제대로 포즈를 잡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오래 해 온 일이었으니까. 호흡과 같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엄지손가락에 힘을 줘 스위치를 누르자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섬광 회로의 커패시터가 충전되기 시작했다. 몇 초가 지나고 충전이 끝나자 원판을 달아놓은 전구가 순간 강한 빛을 냈다. 은색의 금속판에 반사된 빛이 흡혈귀를 비췄다. 꽤나 따가웠다.

  

  흡혈귀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사진기 앞으로 걸어가 뒤에 걸린 감광지를 빼냈다. 다른 어떤 감광제를 써 봐도 자신의 피보다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이 없었다. 흡혈귀라는 종족의 수가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으려니 감광판 위로 자신의 모습이 바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올해도 변함없이 건강한 그의 모습이 작은 종이 안에 담겨 있었다.

  

  “흠……좋아. 나는 아직도 죽지 않았군.”

  

  흡혈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품속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사진 위로 서명과 날짜를 남겼다. 그는 서명이 들어간 사진을 입에 물고서 바닥에 있는 쇠망치와 못을 주워 반대쪽 벽으로 다가갔다. 빈 곳을 찾아 방금 찍은 사진을 올려놓고 끝에 못을 댔다. 왼손으로 차가운 돌 벽의 감촉을 느끼며 힘 있게 망치를 내리쳤다. 벽에 못과 사진이 함께 박혔다.

  

  벽에 박힌 사진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자신이 찍힌 사진들을 둘러보던 그는 망치를 내려놓고 사진의 벽 앞에 붙여놓은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책상 바로 앞의 벽에는 커다란 금속판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별빛을 조명삼아 찍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이었다. 금속판 안에는 벽에 있는 사진 중에서 유일하게 흡혈귀가 아닌 존재가 둘 찍혀 있었다. 중간 부분이 개방되어 있는 경통의 일부, 거기에 손을 대고 있는 한 노인, 그 옆에 놓여 있는 의자, 그리고 왕관을 쓴 채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명의 사람. 

  

  흡혈귀는 책상의 서랍을 열어 빈 노트를 꺼내서 펼쳤다. 잠시 동안 고개를 들어 사진의 두 남자를 바라보던 흡혈귀는 볼펜을 들었다. 별빛이 떨어지는 종이 위로, 그는 빛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17차 판타지 갤러리 단편대회 출품작

http://www.streamz.kr/?contents=novel&title=108&no=16720#title_108

대마
단편/그 외 2014. 2. 1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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