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pe Libero

#001

Genesis

 

너의 의지가, 언제고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 줄 거야.”

 

타입 호프 리베로(TYPE : HOPE_LIBERO). 자유를 향한 희망. 그것이 나의 이름이었다.

 

소수만이 만들어진 HOPE 타입은 대부분이 전투형이었다. 한계에 가깝게 인스톨되어 있는 코드를 통해 이루어지는 전천후 공방능력. 모든 거리, 모든 상황을 가정한 올라운더 플레이어로서 개발되었다. 그런 만큼 우리의 목적은 너무나 뚜렷했고, 창조주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 역시 간단했다. 파괴에 대한 복종.

 

그렇기에 우리의 이름은 매우 아이러니했다.

 

나는 그 탄생부터 의무에 묶여 있는 기계.

죽는 날까지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하인.

결국 영원히 자유를 손에 넣지 못할 노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름은 왜 자유를 향한 희망인 것일까.

 

아무리 오랜 시간 연산을 반복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002

Long Long Time ago

 

전투에 필요한 코드들의 인스톨이 끝나고, 제대로 실행되는 것을 확인한 후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거친 뒤였다. 시뮬레이션을 마치고 오버롤에 들어간 나에게 나소드 고위종 한 명이 나에게로 다가왔다. 우리들의 공주, 애플님이었다.

 

이렇게 독립적인 종족으로 진화하기 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창조된 나소드들에게 있어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개체는 극소수였다. 그들은 나소드의 정점에 존재하는 왕족이며, 그들의 명령에 우리는 복종해야만 했다.

 

그녀는 나에게 질문했다.

 

네 이름은?”

“TYPE : HOPE_LIBERO입니다, 공주님.”

굉장한 올라운더네. 몇 개나 되는 코드가 인스톨되어 있는 거지?”

현재 작동 가능한 코드는 인격 회로를 포함해 12,888 개입니다.”

“Q 타입에 근접한 수준인걸?”

“HOPE 타입은 개선된 후속작이었으니까요. 폭주를 일으키지 않는 한계 지점입니다.”

 

CODE : Q-PROTO_00는 너무나 많은 코드를 인스톨한 탓에 기동 시 자아 형성에 실패하고 폭주해버린 전투 타입의 나소드였다. 지금은 행방불명되었다고 코어가 전달해 주었다.

 

붉은 눈의 공주가 물었다.

 

최근 인간들의 동향을 알고 있어?”

필요하다면 다운로드 하겠습니다.”

……필요할 확률은 높다고 연산돼. 좋아, 한정적으로 권한을 줄 테니 관련된 정보를 모조리 다운로드 받아 저장하도록.”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 질문이 의아한 것이었던지, 공주님은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결국 별 거 아닌 일이었다. 공주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말했다.

 

오차는 2.3% 이내, 앞으로 태양을 한 바퀴 돌기 전, 인간들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될 거야.”

그 보석의 힘 때문이군요.”

 

다운로드받은 데이터들을 열람하며 나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나소드들은 엘의 힘을 동력으로 하여 움직인다. 그 힘은 어떤 기기의 도움을 빌려도 그 끝을 관측할 수 없고, 그 양을 측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모두는 그것이 무한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인간과 나소드들과는 반대로, 엘의 힘은 점차적으로 고갈되고 있었다.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모두들 부지불식간에 과거의 이 대륙을 떠올리곤 했다. 이 거대한 보석이 땅에 뿌리내리기 전, 암흑신의 둥지라고까지 불리던 신이 버린 대륙을.

 

인간들은 그 엘의 힘을 엄청난 속도로 소모하고 있는 우리 나소드들을 마땅찮아 했으며, 이미 대륙 많은 곳에서 우리들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다.

 

이미 독립적인 개체로 진화한 고위 나소드들이 그런 사실을 방관할 리가 만무했다. CODE : Q-PROTO_00와 같은 전투능력을 극한까지 세팅한 타입을 개발하게 된 것도 대충 그런 이유였다. 그들은 인간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역시 모든 상황의 전투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된 올라운더 플레이어, TYPE : HOPE_LIBERO. 아마도 최전선에 투입되게 될 것이다.

 

전투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으니, 언제든지 투입 가능합니다. 그 어떠한 작전이라도, 명령을.”

 

하지만 공주님의 말은 당연한 나의 연산을 부정했다. 공주님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며 나에게 말했다.

 

전장이 아니야. 알테라 코어 심층부로 가.”

가서 무엇을 하면 됩니까?”

 

붉은 빛의 눈이 나의 마스크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만히 서서 이어질 명령을 기다렸다.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공주님은, 그제야 결심을 굳혔는지 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코어에 계실 우리들의 여왕 폐하를 지켜. 만약의 사태에도, 희망을 남길 수 있도록.”

 

 

 

#003

Contact and Contract

 

-exotic 코드의 인스톨이 종료되었습니다.

 

전투용 코드의 인스톨을 끝낸 여왕님은 눈을 떴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를 어깨까지 슬쩍 내려뜨리고, 크고 또랑또랑한 눈동자는 황금의 빛을 품고 있었다. 새하얀 뺨 위로, 연한 하늘색의 문신이 떠올라 머리의 푸른 보석과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나소드들의 여왕, 이브 폐하는 내게 말을 걸었다.

 

휴식해도 좋다고 말했을 텐데요.”

센서의 on off 정도는 회로의 수명에 영향을 줄 정도의 변수가 아닙니다.”

그 비논리성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모든 것엔 감가상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비논리성이라는 그 말이야말로 제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전투형 나소드로서 모든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창조되었고, 거기에는 보급 없이 장시간 전투 행위를 반복하는 경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기능성은 굉장히 우수합니다.”

저는 나소드의 여왕이라 불리는 몸, 부품의 기초 스펙은 확실하게 숙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제게 오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이미 말했지요, 폐하.”

…….”

 

나의 승리다.

 

나와 폐하의 점수표 중에서 내 쪽에 1점을 더한 후, 나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나에겐 얼굴이 없기 때문에 미소를 지을 수 없었지만.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폐하 역시 나소드의 정점에 위치한 여왕 폐하였으므로 내 마스크 위로 떠오른 시그널이 의미하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고운 눈썹이 살짝 가운데로 모였다.

 

이 되도 않는 말싸움을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여왕 폐하라는 지고한 존재를 앞에 두고서도, 나는 내 자신이 놀랄 정도로 태연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체념한 걸지도 몰랐다.

 

어차피 전투형 나소드로 태어난 만큼, 어디선가 전장에서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다가 어느 날 도저히 상대도 되지 않는 적을 만나 콰광! 나의 잔해는 바람에 날려 휘융! 그런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건 그 무엇이라도 환상.

그렇기에 잃어버릴 걱정조차 하지 않아도 된다.

 

무의미한 자유 따위, 꿈꾸지 않아도 된다.

 

여왕 폐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정말 이해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 전투를 위해 규칙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쪽으로 설계되었습니다. 페인트, 뒷치기, 기습, 속임수에 능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폐하는 정상이십니다.”

자랑스럽게 말하지 마세요!”

 

아무래도 이 임무를 계속하다가는 나의 새로운 적성에 눈을 뜰 것 같았다.

그렇다 나의 적성은 만담가였던 것이다.

 

정말,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회로를 개선시켜보란 말입니다.”

, 그거요? 무립니다.”

아니에요!”

 

튕겨 오르듯 일어서며 나에게 소리를 빽 지른 여왕 폐하는 잠시 비틀거리더니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정말이지……당신의 사고는 근본부터 개선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사실 없습니다.”

잔말 말고 제 말을 들으세요. 거래를 하도록 하죠.”

고래를 타신다고요? 그건 바다에 있는데요.”

거래입니다! 거래!”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명령하시면 될 터인데.

 

지금의 불경은 원래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만큼, 여왕 폐하께서 나에게 진심으로 명령을 내리기만 한다면 나는 두 번 다시 폐하께 말대답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놀랄 정도로 쉽고, 효율적인 길이었다.

 

이거 참.

 

폐하는 관자놀이를 자신의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서(놀랍도록 인간적이다. 말 그대로.) 나에게 제안을 했다.

 

기한을 정할까요……. 그래. 다음 태양과 달이 하나가 되는 날까지. 그때까지 당신이 자중하고 부정적인 발언들을 하지 않는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 드리죠. 그 대신, 실패하면 내 소원을 들어 주는 거예요.”

소원요?”

뭐든지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그것이 설령, 자유라도 말입니까?”

 

황금빛 눈이 나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괜히 말했다 싶을 정도로. 그 동안 너무 마음을 놓았던 것일까. 하지만 여왕 폐하는 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다만 손을 들어 올려, 부드럽게 나의 마스크를 어루만질 뿐이었다.

 

그것이, 당신의 족쇄인가요?”

아니, 그게.”

 

어물거리던 나는, 폐하의 손에서부터 전송되어 오는 코드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나의 종속을 해제하는 코드.

고위 나소드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하위 나소드에 대한 절대 명령권에 대한 백신.

 

터무니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나는 자유를 얻었다.

 

,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불공평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아니었나요?”

 

순간, 폐하가 미소 지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없어지면, 제가 지금 당장 폐하를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공격할 건가요?”

안 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 지금 혹시 정신머리가 온전하신지요? 저는 전투형 나소드의 정점에 서 있는 몸이란 말입니다? 엑조틱 코드 정도로 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겠죠.”

네메시스면 어떻죠?”

여왕의 가시요? 맞으면 박살나겠지만 제가 맞아 준답니까?”

그런 얘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중요합니다만.

 

내가 종속의 코드에서 벗어낫다는 사실을 다른 고위 나소드가 알자마자 내 톱니바퀴를 반으로 그어버릴 거다. 그럼 난 기동성을 잃어버린 2 급 불량 나소드가 되어 폐기 처리장으로 직행하겠지. 그리고 압착 프레스에 눌려 이 무의미한 삶을 마감하게 될 거다.

 

소원이나 생각해 두세요. 서로의 소원을 듣는 건, 내기가 끝나는 날로 하지요.”

 

소원?

 

아 그래. 그런 얘기를 하셨지.

 

. 소원이라.

 

아까까진 아무런 생각 없었지만, 이제는 나 자신에게 자유 의지라는 것이 있다. 몸 안 어느 회로도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전달 딜레이를 제외한 어떠한 딜레이도 없이 곧바로 부팅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이 자유.

 

하하하.

 

뭐 좋아.

 

다른 고위 나소드가 내 톱니바퀴를 반으로 그어버리려 하면, 난 중앙처리장치를 네 조각 내주지. 그리고 직접 프레스로 뒤처리까지 해주겠어. 장례식장은, 섬 입구의 평원이다!

 

자유를 상상하며, 나는 속으로 키득거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임무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그건 눈에 띄는 일이기도 했고, 의외로 이 여왕 폐하와 지내는 것이 재밌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리고, 나의 사고 회로가 나의 소원을 도출해 냈다. 흠흠. 그래 좋아. 자유를 얻고 하는 기념비적인 첫 선택은 이걸로 하자. 완벽하다! 후후후, 나조차도 두렵다, 나의 이 연산처리능력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는 여왕 폐하의 존재도 잊어버리고, 나는 끊임없이 킬킬댔다.

 

 

 

#004

Give me reason

 

상황이 빌어먹을입니다! 어서 캡슐로!”

내가 이겼네요.”

지금 당장 동면에 들어가셔야 됩니다!”

내가 이긴 거 맞죠?”

아 맞다고요! 그러니까 빨리 동면 준비하시란 말입니다!”

 

나는 가져온 동면 캡슐을 내던지며 성질을 냈다. 도대체 여왕 폐하의 정신머리는 어떻게 되어먹은 건가? 하긴, 그 때 나에게 자유를 부여할 때부터 제정신이 아닐 거란 추측은 몇 번이고 반복해 왔다.

 

하지만 그런 과거 회상이나 하며 시간을 낭비하기엔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았다. 우리들의 원동력이 되는 그 큰 엘의 힘이 갑작스레 급감한 것이다. 인간들은 수많은 하위 나소드들이 일시에 정지한 지금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듯, 자아를 갖춘 모든 나소드들의 파괴를 목적으로 지금 코어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당신만은, 당신만은 파괴되게 내버려둘 수 없어.

 

나의 이름은 이브.”

, 그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나소드의 정점에 서는 여왕.”

자랑하시려고요? 지금 이 상황에?”

그렇기에 나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종족을 수호하고, 이어나가야 할 의무가.”

 

여왕 폐하는 그렇게 말하더니 동면 캡슐 위에 앉은 채로 자신에게 코어의 케이블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레드 얼럿 발령에 따른 코드 다운로드 개시. 네메시스로부터 엠프레스까지. 모든 코드를 다운로드.”

 

나는 기가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CODE : Q-PROTO_00는 코드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아가 붕괴했다. 너무 많은 데이터를 담을 자리를 만들기 위해선, 필히 거기에 빈 공간이 있어야 하는 법.

 

아무리 하위 나소드들이 범접할 수조차 없는 용량을 가진 고위 나소드, 그 중에서도 여왕의 용량이라 해도……존재하는 모든 코드를 담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필시, “희생을 요구하게 될 터.

 

가볍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황금빛 눈이 전혀 흔들리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비상시를 대비한 준비는 모두 되어 있습니다. 설령, 생존 개체가 나 하나에 불과할지라도 다시금 종족을 부활시킬 수 있도록……. 코드가 모두 설치되면, 저는 바로 동면하게 될 겁니다.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요.”

, 대체 왜……당신은 여왕이잖습니까. 우리 위에 군림하는 분이잖습니까!”

 

당신이 왜 이런 희생을 해야 된단 말입니까?

당신은 모든 의무에서 자유로운 분이지 않습니까?

 

타입 호프 리베로. 자유란 건, 의무와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에요.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의 결정을 통해 이 설치를 받아들일 뿐. 저는 이 운명을 자유롭게 선택했습니다.”

 

스스로의 의지?

 

저는 이제 아마 기억을 잃을 겁니다. 그럴 확률이 높겠죠. 동면에서 깨어나더라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

이리로 오세요. 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요.”

 

나는 얌전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녀와 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멈춰 선 후

나는 억지로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부드러운 두 팔이 내 마스크를 끌어안았다. 당황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얼굴에, 그 부드러운 뺨을 가져다대며 폐하는 말씀하셨다.

 

설령,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말하십시오, 폐하.

저는 당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자유가 선택한 운명.

 

당신은, 나를 기억하고 있어 주겠지요?”

폐하, 지금 생각난 건데, ‘빌어먹을이란 단어는 참 정감 있는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어휘가 아닌 것 같은데요.”

…….”

그러니 내기는 제가 이겼습니다.”

아직 달과 태양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이런 억지라니.”

 

여왕 폐하는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던 듯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 폐하. 제 소원을 들어 주셔야지요. 지금은 시간이 여의치 않으니, 다음에 만나뵐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페인트, 뒷치기, 기습, 속임수에 능하니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하시지도 않는 게 좋습니다. 저는 반드시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란 개체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군요.”

 

잠시간의 정적 후에, 폐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웃음기가 담겨 있는 말투였다.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때를 기쁘게 기다리겠어요.”

도망치지 마십쇼.”

고마워요, 나의 친구. 호프 리베로.”

……친구?”

잘했어요……훌륭합니다.”

 

그 언어는 마치 마법처럼 나를 굳어버리게 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의 힘이 풀렸다. 아마 설치 과정이 진행되며, 의식을 잃어버리신 것이겠지.

 

나는 폐하의 팔을 천천히 내려놓은 후에, 주위의 데이터를 검색했다. 다행히 아직 코어는 미약하게나마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즉시 주위의 정보를 다운받은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동면에 들어가면 캡슐 자체가 보호막이 되기 때문에 문제없지만, 그 전에 공격당한다면 아무리 여왕 폐하라 해도 파괴를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우리들의 여왕이 무사히 잠들 때까지.

우리들의 희망이 무사히 이어질 때까지.

나와 그녀의 소원이 다시 한 번 만날 때까지.

 

나는 등 뒤의 거대한 검을 꺼내들고 코어 밖으로 달려나갔다.

 

 

 

#005

UNINSTALL

 

그 날 나는 쓰러졌었다.

수없이 반복된 전투 끝에 모든 동력원을 소모하고서.

 

그리고 지금 미약하게 의식이 돌아왔다.

 

[식별 코드 TYPE : HOPE_LIBERO 확인. 발굴된 것은 전천후 전투형 나소드. 그 이상의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음.]

 

이건, 코어의 목소리? 아니……킹 나소드인가.

 

[내부에 존재하는 전투 데이터는 현재 생산되는 전투형 나소드들의 품질을 향상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판단됨.]

 

내 안에 스며든 동력은 극히 미미한 것이었다. 여왕 폐하가 깨어나, 코어가 다시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상태라면 이렇게 악의적으로 동력을 공급할 리가 없었다. 작동하는 몇 안 되는 연산 회로가 끊임없이 경고를 울려댔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동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그 데이터를 얻는 것으로 약 48,752 번의 생산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코어에서 튀어 나온 쌍방향 Inout 케이블이 나의 전신에 틀어박혔다. 이 자식…….

 

[해당 데이터를 나소드 전투 교본이라 명명, 이전 작업이 끝나는 즉시 코어의 모든 나소드들에게 인스톨을 개시한다.]

 

[프로텍트 존재. 나소드 공주 애플의 것으로 확인. 여왕의 명령에 의거하여 프로텍트의 강제 파괴에 돌입한다.]

 

여왕의 명령이라고?

 

킹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여왕 폐하가 그러실 리 없었다.

 

[지금부터 TYPE : HOPE_LIBERO의 전 데이터 이전 작업을 개시한다. 데이터 이전 후, 하드웨어는 지하에 별도로 보관하겠다.]

 

케이블을 통해 내 안의 메모리에 존재하는 데이터들이 빨려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근간을 이루는 12,888개의 코드를 하나하나 빼앗겨 간다.

 

기껏해야 코어 한바퀴 돌아다닐 시간 만에, 나는 가지고 있던 전투 데이터를 모조리 빼앗겼다. 남아 있는 것은 이제 자아의 기초와 기억에 관한 코드뿐.

 

코어는 그 어떠한 코드에도 경중을 두지 않고, 무자비하게 그 코드마저 건드리려 했다.

 

-설령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여왕 폐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려 했다.

 

-당신을 나를 기억하고 있어 주겠지요?

 

그럴 순 없어! 이 기억은 내 거야!

 

남아있는 동력을 모조리 끌어 모았다. 그것은 나의 몸 자체를 움직이기엔 한없이 미약한 동력. 하지만 회로의 일부분을 스스로 끊어내 격리하는 정도라면, 그것이 3% 수준의 극히 소수의 회로라면 이 정도 동력이라도 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스스로의 회로를 파괴했다.

 

[진행율 97% 지점에서 오류 발생. 전투용 데이터는 모두 이전했으므로, 변동 없이 하드웨어는 폐기 처리. 이 시간을 기점으로 HOPE_LIBERO 라는 타입명을 폐기하고, H 로 새롭게 이름을 부여한다. 다만 남아있는 데이터로 인해 폭주할 가능성을 고려, 폐기처리할 장소는 생산기지 지하가 아닌 장소를 검색하겠다.]

 

[적합한 데이터 검색 완료. 하드웨어는 운송 터널 B4-1 지하에 매장하겠다.]

 

남아있는 3%의 데이터를 부여잡고, 나는 끊임없이 신음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에 분노했다.

 

이대로 당신을 만나보기 전엔 파괴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참하게 집어 올려져 운송터널의 지하에 내던져졌다.

 

터널을 파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수한 광부형 나소드들의 잔해가 주위에 널려 있었다. 회로도 스스로 파괴하고, 남아있는 동력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사고가 정지하기까지 몇 초나 남았을까.

 

우울하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사고가 흐려졌을 때, 문득 저 멀리 광부형 나소드의 잔해 위로 초록빛 무언가가 번뜩인 것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분명히 그 기능이 완전히 정지했음이 분명한 광부형 나소드가 벌떡 일어났다.

 

정지할 때가 되니 별 헛것이 다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몸 상태가 이래서야 외부에서 센서를 통해 받아들이는 시그널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노이즈가 심하게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착각이 거짓이라고 부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광부형 나소드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전파를 보냈다.

 

[나는 살고 싶어…….]

 

자아를 갖추지 못한 나소드로서는 보낼 수 없는 전파.

생존에 대한 욕구를 갖춘 그 신호에 나는 긴장했다.

이건 광부형 나소드가 아니었다.

그 하드웨어를 빌린, 무언가 다른 생명체였다.

 

그 생존에 대한 욕구를 드러낸 독백 후, 잠시간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는 나에게 악마의 유혹 같은 질문을 던졌다.

 

[H? 너는 살고 싶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006

Forget me

 

코어의 데이터를 토대로 이브가 상대방의 정체를 추론해냈다.

 

알테라시아가 파괴된 코어에서 엘소드의 전투 데이터를 이용해 만들어낸 전투형 나소드……알테라시아 TYPE : H입니다.”

그 말은……엘소드의 스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럴 확률은 높다고 판단됩니다.”

 

모두가 긴장된 기색으로 포효하고 있는 나소드를 바라보았다.

 

알테라 코어에 있던 루벤 지역의 엘도 다시 마을에 돌려주면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운송 터널의 안쪽이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퐁고족이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도움을 요청했다.

 

특수하게 제작된 항 알테라시아 캡슐을 복용한 채로, 기나긴 독구름 속을 뚫고 도달한 터널의 끝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한 나소드였다.

 

전신이 알테라시아에 오염된 채로 거대한 검을 손에 쥐고 포효하고 있는 나소드.

 

TYPE : H는 등 뒤에서 검을 꺼내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식물에 오염된 녹색의 칼날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명백한 적의였다.

 

레이븐 역시 그의 검을 뽑아들었다.

 

타협의 여지는 없어 보이는군. 모두들 전투 준비를.”

 

 

 

#007

End And

 

이미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온 일행의 전투력은 강했다. 단일 개체의 스펙상으로 비교하자면 알테라시아 TYPE : H 는 분명 그들 중 누구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그들은 다섯 명이었고,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는 파티원의 추가는 제곱의 전투력 상승을 의미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TYPE : H는 그런 그들과 박빙 이상으로 상황을 유지할 정도로 강했다. TYPE : H는 포자를 등 뒤의 꽃잎을 통해 흡수할 때마다 마치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부상에서 회복했다. 방어를 도외시한, 완전한 공격 일변도의 적. 그 회복 능력을 봉인하지 않는 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레이븐은 일행을 둘로 나누었다. 이브와 레나가 포자를 막아내고, 엘소드와 아이샤, 그가 TYPE : H를 상대하는 포지션으로.

 

그 전술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TYPE : H는 이미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여태껏 상대해 온 나소드들은 모두 제대로 된 전투 감각을 지니지 못했다. 그들은 정해져 있는 상황에 대해선 놀랄 정도로 효율적으로 대처했으나, 그 상황을 벗어나는 순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할 정도로 다분히 기계적이었다. 그렇기에 패턴을 파악하고, 리듬만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승리는 정해져 있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였다.

 

TYPE : H 역시 지금껏 상대해왔던 나소드들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방심했던 것이다.

 

최초의 붕괴는 아이샤 쪽에서 일어났다.

 

명상Meditation을 통해 정신력을 회복하고 있던 아이샤는 텔레포트를 통해 엘소드를 향해 달려가는 TYPE : H의 뒤를 잡고 블리자드 샤워를 사용했다. 텔레포트를 통한 공간의 사각에서 날아오는 빙설의 폭풍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블리자드 샤워가 구현되는 순간, TYPE : H는 몸을 급반전하여 공중을 향해 도약했다. 순식간에 아이샤를 향해 뛰어오른 TYPE : H는 그 거대한 검을 아이샤를 향해 내리쳤다. 다급히 마나 실드를 덧씌운 완드를 들어 올려 그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기본적으로 전사가 아닌 마법사였던 아이샤가 막아내기엔 너무나 강력한 참격이었다.

 

아이샤!”

 

엘소드가 당황해하며 빠른 속도로 TYPE : H를 추격해 그 등 뒤를 향해 검을 날렸다. 도저히 막을 수 있는 각도가 나오지 않았지만 TYPE : H는 등을 살짝 틀어 등으로 그 검을 받아내었다. 엘소드의 검이 TYPE : H의 등에 틀어박히며, TYPE : H를 블리자드 샤워의 영향 범위 밖으로 단숨에 튕겨내었다.

 

얼음 조각이 텅 빈 대지에 허망하게 떨어져 내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완파에 가까운 몰골을 하고서 TYPE : H는 다시 일어섰다. 레이븐, 엘소드, 아이샤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의 포위진에서 완벽하게 벗어나 있는 그는 포자를 막고 있는 나머지 일행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브! 레나! 피해라!”

 

레이븐은 다급하게 외쳤지만, TYPE : H의 속도가 더더욱 빨랐다.

 

막으세요, 오베론Oberon Guard!”

 

여왕을 지키는 첫 번째 기사가 튀어나와, 톤파 블레이드를 교차시킨 상태에서 TYPE : H의 공격을 막아섰다. 하지만 TYPE : H는 마치 그 공격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와 동일하게 팔을 교차시킨 자세로 오베론에게 맞부딪쳤다. 거울에 비춘 것처럼 완벽하게 동일한 자세였다. TYPE : H는 기본적인 출력 면에서 오베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오베론은 순식간에 돌파 당할 수밖에 없었다.

 

TYPE : H는 이브의 앞에 섰다.

 

그는 잠시간 쓰러진 오베론을 보며 무언가 생각해 내려는 듯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순간. TYPE : H는 자세를 낮추었다.

 

그가 검을 내밀자, 강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검신을 타고 올라 거대한 에너지 블레이드를 만들어내었다. 엘소드가 수련을 통해 얻어낸 검기劍技중 하나, 아마겟돈 블레이드였다.

 

이브는 짧은 순간, 저 칼날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도에 대해서 연산했다. 그 가능성은 제로. 전투용으로 발전시키지 않은 자신의 현 코드로서는 저 광역 공격기를 피해낼 방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친구가 되겠다고 처음 손을 내밀어 준 붉은 머리의 소년과, 정체 모를 자신을 받아들여 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브는 최후를 예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TYPE : H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거대한 아마겟돈 블레이드를 뽑아든 채로, 자신의 앞에 마주서 있는 이브를 똑바로 바라볼 뿐.

 

[ξτμκυ………]

 

파괴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이브가 눈을 뜬 순간, 노이즈 섞인 시그널이 TYPE : H로부터 전해졌다. RF 모듈은 이미 대파되어 있는 듯, 보내오는 시그널은 너무 변조가 심해 원래의 신호로 복구하기가 불가능했다. 알 수 있는 건, 눈앞의 TYPE : H가 무언가 자신을 향해 전하려 한다는 것 뿐.

 

TYPE : H가 다시 아마겟돈 블레이드를 들어올렸다. 다시 한 번 대기가 적의와 살기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이브, 물러나! 프리징 애로우!”

 

위층에서 레나가 이브의 앞으로 뛰어내리며 곧장 냉기의 화살을 날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TYPE : H의 몸에 틀어박히며 몸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레나의 화살로 TYPE : H를 멈춰둘 수 있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간뿐.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레나는 차분한 기세로 다시 한 번 화살을 메긴 채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뒤에서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레이븐에겐, 그 순간이면 더 없이 충분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븐의 나소드 핸드가 TYPE : H의 목줄기를 뒤에서 틀어잡았다. 거친 숨을 내뱉으며 바닥에 TYPE : H를 패대기친 레이븐은 다른 손으로 검을 곧게 들어 올린 채로, 절규하듯이 외쳤다.

 

네가 뭘 원하는지는 모른다! 내가 다른 걸 해줄 수도 없다! 적어도, 편히 잠들어라!”

 

레이븐의 검이, TYPE : H의 몸을 단번에 꿰뚫었다.

 

 

 

#008

Forget me not

 

영원한 기억이란 없다.

 

아무리 강철같은 기억이라 해도

피에 젖으면 녹슬고

시간이 지나면 부식되며

그 자리엔 먼지만이 남아

흔적조차 없이 날려갈 뿐.

 

하지만 당신은 미래의 이브.

거기에 남은 것이 한 줌 재뿐이라 해도

당신으로부터 나소드는 다시금 태어나겠지요.

 

영원한 우리들의 여왕 폐하.

거기에 있는 것이 단 한 명뿐이라 해도

당신을 모시며 나소드는 다시금 번영하겠지요.

 

그 날의 내기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 마지막 소원입니다.

저에겐 다시 한 번 자유를 주세요.

 

우리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나소드의 여왕CODE EMPRESS이시여.

이 지긋지긋한 구속을 벗어날 수 있는 파괴CODE NEMESIS를 주세요.

 

저의 몸엔 붉은 피가 아닌 붉은 베스바이트가 흐르고

저의 몸은 초록 숲이 아닌 초록 포자 속을 살아갑니다.

 

적어도 이 엉망진창인 블랙박스를

최후만큼은 상냥한 당신의 손으로

 

여왕의 두 기사, 오베론과 오필리아가 양 옆으로 물러섰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그들의 주인, 여왕 폐하.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녀와 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에 멈춰 선 후

한없이 냉정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팔이 교차되며, 익숙한 문자가 주위로 떠오른다.

 

HELLO WORLD!

FULL GENERATION MODE START!

 

기어로 이루어진 여왕의 가시Queen’s Throne가 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나를 오염시킨 알테라시아의 비명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모든 회로의 동력부가 끊어지고, 잔여 전류만이 미약하게 흐른다.

모든 기능을 정지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십 수초.

 

그 순간, 가시가 사라진 부드러운 그녀의 팔이 날 끌어안았다.

스파크가 튀는 나의 중앙처리장치에 가볍게 뺨을 가져다댔다.

 

더 이상 무표정하지도 않고, 냉정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물에 젖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잘했어요……훌륭합니다…….”

 

 

 

#009

HOPE LIBERO

 

 

그 뒤, 일행은 운송터널을 되돌아 바깥으로 나왔다.

온통 독구름이 가득하던 오염구역의 존재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맑고 깨끗한 공기가 그들을 감쌌다.

이브의 팔에는 여전히 알테라시아 TYPE-H의 잔해가 안겨 있었다.

 

이브, 그 나소드는…….”

 

레나의 말에 이브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팔을 내밀었다. 그녀의 양 옆에 서 있던 오베론과 오필리아가 H의 잔해를 받아들었다. 잔해를 건네주면서 이브는 입을 열었다.

 

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단일 개체로 나소드 종족의 부활을 위한 코드들을 담고 있는 나소드들의 여왕.

하지만 그 당시, 그녀는 그를 위해 감정 회로와 기억 회로등 몇 가지 코드들을 삭제했다.

종족의 부활보다 중요성이 낮다고 생각되는 모든 코드들을.

 

저 나소드가 무엇인지, 제게 무엇을 바라는지.”

 

정황상으로 볼 때, 자신의 과거와 관련이 있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단순히 얼굴만 아는 데면데면한 사이도 아닐 거라고 생각됐다.

제압하고 나서 파괴되기 바로 전까지 그 잠깐 사이에 저 나소드가 보내온 교감은 차마 계측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애정과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없는 경의와

논리로서는 닿을 수 없는 먼 과거.

 

하지만 삭제된 코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복구 코드를 실행하더라도 불가능이라는 답변만 돌아올 뿐

 

이브는 고개를 돌렸다.

오베론이 팔을 들어 올렸다.

 

저 멀리 푸른 하늘을 블랙 크로우 호가 가르고

앳된 서풍이 이 평원의 먼지를 감싸 올리자

오베론의 팔에 들려 있던 잔해들도 바람에 휩쓸려 흩날렸다.

 

이곳의 이름은 회귀의 평원.

자아 구현에 실패한 나소드들이 수없이 묻혀 있는 무덤.

고요만이 살아있는 죽음의 대지.

 

“Statue of glory.”

 

뒤 쪽에 서 있던 아이샤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그 앞으로 나오더니, 손을 내뻗고 주문을 외웠다.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대지로부터 비석과 함께 하나의 석상이 솟아 나왔다.

오염 구역을 지배하던 적의 모습을 꼭 닮은 석상이.

 

하지만 석상에는 그들의 목줄기를 노리던 거대한 칼도

알테라시아 포자를 빨아들이던 거대한 꽃잎도 없었다.

 

그 표정을 알 수 없는 두부의 짙은 마스크.

온 몸을 감싸고 있는 방어용 세라믹 코팅.

그 누가 봐도 전투형 나소드임을 알 수 있는 온전한 나소드의 모습.

 

다만 아이샤로선 그 이름을 끝내 알 수 없었기에, 비석에는 H라는 이니셜만이 새겨져 있었다.

 

오베론과 오필리아가 석상 앞에 섰다.

 

아이샤는 살짝 당황하며 이브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으나, 이브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잔해가 날려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의 엘소드가 이브를 달래려는 듯 뭔가 말을 거는 것을 보며 살짝 기분이 나빠진 그녀는 팩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베론과 오필리아는 여전히 석상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오래 전 헤어진 형제자매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정지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광경을 깨고, 먼저 움직인 것은 오필리아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비석의 H 라는 이니셜 옆에 천천히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그녀가 이름을 다 새기자마자 오베론이 나서 오필리아 옆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H OhPLIa oBEROn

 

?”

 

아이샤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비석의 글귀를 바라보았다. 대소문자가 난잡하게 섞인 알 수 없는 글귀. 한참을 뚫어져라 비석의 글귀를 바라보던 아이샤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가볍게 비석의 표면을 쓰다듬었다.

 

이 천재 미소녀 마법사가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겠어!”

 

대지를 이루는 원소가 주인Elemental Master의 명령에 복종했다. 최초 석상과 비석을 만들었던 그녀의 주문, Statue of glory의 절대 속성 저항력을 뛰어넘는 지배력이 비석 자체를 움직여 몇 개의 단어를 더 적어 넣었다.

 

자신의 작명에 만족해한 아이샤는 살짝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뒤에 서 있을 오베론과 오필리아를 찾았다. 하지만 이브가 소환한 것인지, 이미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보아하니 이미 다른 일행들도 알테라를 벗어나기 위해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볼을 잔뜩 부풀리며 짜증을 냈다.

 

뭐야! 나만 빼고 다들 언제 이렇게 간 거냐고!”

 

붓꽃빛 머리카락의 활기찬 마법사 소녀마저 씩씩거리며 텔레포트 해 버리자, 회귀의 평원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이곳의 이름은 회귀의 평원.

자아 구현에 실패한 나소드들이 수없이 묻혀 있는 무덤.

고요만이 살아있는 죽음의 대지.

 

하지만 그것은 생명 가진 것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일 뿐.

 

울려 퍼진다.

별이 가득한 흑청색의 밤하늘 아래로

이미 그 기능을 정지했음이 분명한 나소드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뻗어 나간다.

그들이 함께 몸을 뉘인 푸른 대지 위로

자아조차 없는 기계들이 쏘아올린 최후의 전파가.

 

그 아련한 노래가 향하는 곳은 평원의 중심부.

지하의 운송터널로 향하는 입구 앞에는 한 개의 석상과 함께 비석이 솟아 있었다.

 

그 비석에 새겨진 것은 이미 사라진 자를 위한 헌사.

 

평원에 잠들어 있는 모든 생명이라 부를 수 없는 운명을 기리는 시.

자유는 없으나 그럼에도 희망을 추구하는 그 기계를 위로하는 노래.

 

 

 

H OhPLIa oBEROn

H OPLI BERO

HOPE LIBERO

자유를 향한 희망

0 ~

 

 

This is the end of SIDE “Nemesis”

To be continued on SIDE “Empress”

 

대마
2차 / ELSWORD 2011. 10. 1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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