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_04

이건 어디까지나 히라츠카 선생님에 대한 나의 혼잣말이다. 프라이빗한 생각이라고나 할까.

 

나이는 불명. 절대 알려주지 않으니까.

몸매는 발군. 쭉 뻗은 밸런스 정도야 보면 알지.

미모는 탁월. 가끔씩 이 사람이 30(추정)라는 걸 잊을 정도.

격투는 최강. 몇 번 전설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저런 겉모습으로 결혼을 못한 걸 보면 분명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면의 안쓰러운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본인조차도 자조 삼아서 그런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히라츠카 시즈카는 교직에 서서는 안 됐다.

 

학생은 언젠가 모두 졸업한다. 그리고 학교를 떠난다. 제아무리 친근함을 쌓아올린 관계라 할지라도, 졸업과 동시에 급격하게 옅어지기 시작한다. 교사는 떠나가는 학생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다.

 

누구라도 그건 힘들겠지. 깊게 형성된 관계가 강제로 잘려나갈 때의 충격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봐 온 선생님들은 다들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학생들을 세심하게 살피며 다가가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조치를 취한다. , 개중에는 뭐 저런 놈이 선생인가 싶은 놈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시스템에서 모두가 자격을 갖추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중요한 것은 평균.

 

하지만 히라츠카 시즈카는 그 평균을 따르지 않는다.

 

다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써야 할 시간과 노력을 학생들에게 써 버리고 만다. 봉사부만 봐도 그렇다. 이 부실은 근본적으로 유키노시타를 치료하기 위한 집중치료실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증상이 비슷한 내가 거기에 끼어 들어갔을 뿐이고. 그리고선 우리가 스스로 답을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상황을 조성해 준다. 그 결과를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한 명의 학생에게 쏟는 애정과 관심치고는 지나친 감이 있다. 아마 유키노시타는 처음도,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히라츠카 시즈카는, 그녀의 앞을 지나가는 모든 문제아를 향해 그 올곧은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주겠지.

 

그 모든 관계가 졸업과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답받지 못할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소……아니, 매우 제멋대로인 유키노시타 하루노의 요청을 그다지 거절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루노의 존재 자체가 그래도 히라츠카 시즈카라는 인간의 삶에 대한 조그마한 보상이나 희망이 아니었을까. 그 둘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는 같은 과거를 공유하지 못하는 인간은 다가갈 수 없는 묘한 교감이 느껴진다.

 

아마 앞으로도 히라츠카 시즈카는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사랑을 되돌려 줄 수 없는 학생을 사랑할 것이다. 모두들 그런 감정의 조짐 정도는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아마도 선생님이 진정으로 애인을 사귀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겠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여자를 사랑해 줄 남자는 드문 법이니까.

 

눈이 오건 비가 오건, 히라츠카 시즈카는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졸업과 함께 학교를 떠날 우리들이 성장하길 바라면서. 언제까지나 쪼그려 앉아 버려진 고양이가 스스로 살길을 찾아 움직이기를 바라면서. 물에 젖은 자그마한 종이 상자 앞을 하염없이 지킨다.

 

그렇게나 강하고,

 

그렇게나 아름다우면서도,

 

끝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해 움직이질 못하고, 조금씩 외로움에 말라붙어 간다.

 

히라츠카 시즈카는 분명 유키노시타 자매와 같은 완전성을 품고 있다.

 

혼자 있어도 빛나는 별과 같은 빛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선생님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

 

그 빛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가능성이 외로움에 꺼져버리는 모습을

 

나는 결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4

 

 

 

오랜만에 학교를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오랜만에 온 게 맞았다. 첫날 병원에 실려 갔었지, 그 뒤로 7일 정학을 당했지. 일주일은 넘게 학교를 가 본적이 없었다. 은근히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냥 계속 안가고 진급시켜줬으면 좋겠네.

 

코마치가 차려준 식사를 먹고서 입학식 날이 생각날 정도로 일찍 집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할 때랑은 차원이 다르다. 지금의 나는 4족 보행, 두 개의 목발을 짚고 있는 것이다. 발이 넷이면 이동력이 두 배여야 할 거 같은데 왜 절반도 안 되냐고.

 

지네의 스피드에 경이를 느끼며 간신히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 도착한다고 끝이 아니었지만. 움직이는 거 자체가 힘들어지니 화장실을 가는 거며 식사를 하는 거며 쉬운 일이 없었다. 게다가 반의 분위기도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즐기는 분위기였던지라. 남이 일어설 때마다 웅성거리지 좀 말라고.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토베가 알게 모르게 많은 부분에서 나를 도와줬다는 것이다. 그래도 리얼충 그룹에 들어있던 관록(웃음)이 있어서 그런지 애들의 시선이 모일 때와 떨어질 때를 제법 재주 있게 구분하며 나를 부축해 준다거나, 뭐를 대신 가져다준다거나 했다. 너무 재주가 좋아서 토 발음으로 시작하는 성을 지닌 사람들은 천사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다. 확인을 위해 토츠카 쪽을 잠시 바라보니 금방 내 시선을 눈치 채고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천사가 맞군요. q.e.d 증명종료.

 

내 증명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토베의 얼굴을 바라보며 슬쩍 그 옆에 있어야 할 한 남자의 자리를 향해 눈을 돌렸다. 하지만 리얼 리얼충 하야마 하야토는 자리에 없었다. 그게 좀 신기했다. 하야마는 아침부터 내내 쉬는 시간만 되면 F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누군가와 단 둘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 대상은 매번 바뀌었지만.

 

, 저 녀석이 뭘 하건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마지막 수업 준비를 했다. 히라츠카 선생님의 국어 수업이었다.

 

수업종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이 교과서와 프린트물을 들고서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내 자리를 힐긋 바라보더니 툭 하고 던지듯 말을 꺼냈다.

 

히키가야. 방과 후 직원실로 와라. 상담이 있으니까.”

?”

 

나는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상담이라니.

 

말 그대로다. 사고를 쳤으니 재발 방지를 위해 상담을 받아야겠지. 여튼 잔소리 말고 수업 끝나고 찾아오도록.”

 

나는 피로가 가득해 보이는 선생님의 말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으음. 상담이라니……. 또 귀찮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데.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마지막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곧장 히라츠카 선생님을 따라 직원실로 갔다. 목발을 짚고 있는 내 모습을 잠시 슬픈 듯한 눈길로 바라보던 선생님이 물었다.

 

힘드냐?”

, 익숙해지면 괜찮겠죠.”

힘들다는 말을 돌려서 대답하지 마라.”

 

어라, 이런 비슷한 대화를 언젠가 했었던 것 같은데. 히라츠카 선생님은 직접 간이 의자를 펴서 내 앞에 놓아주었다. 내가 자리에 앉는 모습을 끝까지 확인한 후에야 자기 의자로 돌아가 몸을 싣는다. , 사서 고생이라 해야 할지.

 

관절을 보호하는 물품은 꽤나 많은데. 필요하다면 주마. 아니지, 필요하지 않아도 주마. 하고 다니도록.”

그런 건 대체 왜 사신 겁니까. 선생님이 나이가 충분히 많긴 하지만 아직 관절 걱정할 때는 아니잖……죄송합니다.”

 

눈에 살기가 담겨 있다. 저건 진심이다. 내 사과에 치켜 올렸던 눈초리를 내린 선생님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대학 때는 격투기를 열심히 했었으니까 말이다.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지는 정도는 나도 많이 체험했었지.”

그런 부상을 당하시고도 계속 하셨습니까?”

나랑 맞붙은 사람은 다 쓰러졌는데, 엄살을 피울 수야 없지 않느냐. 이기니까 재미도 있었고.”

 

과연……권왕의 관록은 거기서 피어나온 것이었나. 세기말에 가면 구세주가 될 것만 같다. 혹시 세계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코마치를 데리고 히라츠카 선생님에게 보호를 부탁해야겠다.

 

책상 위에는 보고서처럼 보이는 서류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평소라면 남자다움을 넘어 악마다운 호쾌함을 자랑하는 카츠-둔 그릇이나 열혈 애니메이션이 재생되는 모니터가 있던 자리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서류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

 

히라츠카 선생님은 어색하게 말을 골랐다. 내가 지적하기 곤란한 물건이었나. 하지만 선생님은 이내 표정을 풀고 대답했다.

 

별 건 아니다. 시말서를 겸한 보고서라고나 할까. 생활지도 담당이랑 담임, 부담임들은 전부 쓰는 거지. 교장이 노발대발했으니까 말이다. 분명 붕괴 조짐이 있으니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전달을 그따위로 했느냐고. 그 뒤로는 교감, 그 뒤로는 주임. , 솔직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짜증과 피로가 쌓여 있는 듯한 선생님을 보니 문득 죄책감이 몰려들어왔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아. 히키가야.”

 

선생님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질 수는 없단다. 그러니 사과하지 마라. 이건 내 것이니까. 교장 선생님의 의도를 제대로 학생들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던 내 책임 말이다.”

아니, 그건…….”

네 잘못은 올라가지 말라고 했던 옥상에 올라갔던 것 하나뿐이다.”

 

선생님은 내 말을 끊으며 단언했다.

 

그리고 그거에 대한 벌은 이미 과하게 내려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비굴해지지 말고 어깨를 펴라.”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내 다리를 가리켰다. 하긴 뭐, 벌이라면 벌이겠지. 자업자득인 기분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서도.

 

그리고 어찌 됐건, 네가 생명을 소중히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니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인 건 훌륭한 일이지. 다만 그 부분을 순순히 칭찬할 수 없는 건 아직도 네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란 말이다.”

 

선생님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내 이마를 때렸다. 따악,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순간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매만지고 있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유쾌하게 웃었다.

 

다치지 좀 마라. 가슴이 아프니까.”

 

웃음을 멈춘 히라츠카 선생님은 위에 있던 시말서들을 한 구석으로 밀어둔 채, 서랍을 열어 두터운 표지로 철이 되어 있는 일지를 하나 꺼냈다. 중앙에 붙어있는 새하얀 종이 위에 프린트 된 글씨는 상담 일지. 선생님은 그 일지를 펼쳐 내 앞으로 내밀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 상담일지는 네 정신교육의 일환이다. 원래대로라면 3주 정학이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에 상담을 병행하는 것으로 1주일까지 줄일 수 있었지. 정말, 설득이 너무 힘들었다. 역시 늙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다니까……그런가……후후후, 역시 나는 아직 젋군…….”

 

감동을 받으려다가 마지막에 묘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선생님……. 누가 제발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나밖에 없잖아.

 

선생님이 제 정신을 차리고 상담일지에 대한 설명을 하려는 그 때, 직원실 저편에서 누군가 선생님을 불렀다.

 

히라츠카 선생님! 교감 선생님께서 부르십니다!”

 

교감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선생님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스쳐간 선생님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선생님, 대체 뭔 짓을 하고 계시던 겁니까.

 

, 또 뭐가 걸린 거지……? , 곧 가겠습니다!”

 

이전부터 생각하던 거긴 하지만, 선생님은 교사들 중에선 문제아 축에 가깝지 않을까. 많은 행동들이 다른 선생님들과는 조금 다르다.

 

히키가야. 상담일지 대충 채워 넣도록 해라. 내가 시말서 쓰지 않을 정도로만. 알겠나?”

…….”

그걸로 네가 받아야 하는 벌은 모두 끝이다. 가능하면 끝까지 보고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말이다. 내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구나.”

 

혀를 차면서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은 교감 선생님에게 가기 직전, 상담 일지를 들춰보고 있던 나를 향해서 말했다.

 

히키가야. 책임도 그렇지만, 사람은 혼자선 살아갈 수 없다.”

 

그건 아마 선생님이 직접 겪어온 경험에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배워나가도록 해라. 아직은 아무것도 늦지 않았으니까.”

 

외로워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넌 그래도 낫지. 내가 더 힘들었어. 그런 자신의 불행을 떠넘기는 듯한 발언을 일체 하지 않는다.

 

서로의 고통을 비교해서 뭐하자는 건가. 그 말뜻은 결국 그거 아닌가. 내가 더 많은 고통을 받았으니,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심리. 그걸 본능적으로 짐작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불행을 겨룬다.

 

……나라고 다르진 않았지. 유키노시타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문득 웃음이 나오려 했다. 뭘 그렇게 아득바득, 어차피 의미도 없는데.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선생님의 말을 긍정할 수는 없었다.

 

나와는 격이 다르다 할 수 있는 선생님조차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건 결국 나는 살아갈 수 없다는 소리와 다른 게 없으니까.

 

나는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선생님은 생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그리고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 쓰거든,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흑연이 종이를 긁는 소리는 무언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나는 한 시간 정도에 걸쳐서 천천히 상담 일지를 채워 넣었다. 괜한 심통으로 내용을 방과__여교사_충격의_XXXX[HD].avi로 만들어 줄까 싶기도 했지만, 내 사회적 생명이 위험하므로 적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런 거 없잖아. 그냥 적을 걸 그랬네.

 

참고로 XXXX에 들어갈 글자는 컨드불릿이다. 충격의 섹컨드불릿! 발음이 좀 거칠지만 이상한 상상을 하시면 곤란합니다.

 

한 시간 정도로는 히라츠카 선생님을 호출한 용건이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잠시 동안 쓸데없는 상상을 하던 나는 상담 일지와 손때가 묻어 있는 연필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슬슬 가 볼까.

 

처음부터 가방을 가지고 나왔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길어질 거란 생각을 못 해서 교실에 두고 나왔다. 나는 목발을 짚은 채 직원실의 문에 손을 뻗었다.

 

문을 열자 하얀 풍경이 보였다.

 

직원실에 들어오기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에 잠시 움찔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보니 눈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하게 내려앉는 눈. 다만 그 알알은 꽤나 굵어서 이미 바닥은 모두 새하얗게 칠해진 뒤였다. 평온한 함박눈이라고나 할까.

 

나는 한숨을 쉬며 교실로 이동했다. 목발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아직도 서툴렀다. 두 팔에 바짝 힘을 줘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얼마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도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가, 책상 위에 내팽개쳐져 있는 가방을 주워들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 창 밖, 아무도 없는 교실안의 책상은 모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가방이 아무렇게나 올라가 있는 내 자리를 빼고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가방을 찢거나 하는 놈들은 없었군. 나는 목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방을 어깨에 잘 걸쳤다. 그리고는 의자를 제대로 책상 안에 집어넣었다.

 

계단을 내려와 복도를 걷는다. 턱없이 느린 속도로. 목발의 나사가 삐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사이 눈이라도 그치면 좋으련만.

 

하지만 미약한 내 기대와는 다르게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건물의 문 바로 한 발자국 안에서 조용히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쩔까.

 

평소라면 눈 정도야 맞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목발을 짚고 있는 상태다. 과연 이 다리로 눈 덮인 도로를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히라츠카 선생님을 기다렸다가 부탁해서 바래다 달라고 할까…….

 

내 생각에 유쾌함이 밀려와 식도 부분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 역시 과도한 농담은 좋지 않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목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누군가에게 부탁한다고? 허나 거절한다!

 

나는 얼마 안 되는 희미한 발자국들마저 사라져 가는 눈밭을 걸었다. 요컨대 눈이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건 밟히고 난 뒤다. 꽉꽉 눌러진 눈 위에 물기가 어리고, 그게 다시 얼어붙으면서 빙판으로 변하게 된다. 눈이 쌓이기 시작한 지금 빠르게 이동한다면 문제가 될 여지는 없겠지. 그런 장비로 괜찮은가? 괜찮아, 문제없다.

 

가끔 가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남겼던 발자국들이 금세 눈에 뒤덮여 사라져 있었다. 머리와 어깨 위로 쌓이는 눈을 가끔씩 멈춰서 털어내며 나는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다.

 

장갑을 끼고 올 걸 그랬다. 다른 데는 그래도 멀쩡한데 눈을 계속 맨살에 맞고 있는 손이 너무 차가웠다. 평소처럼 주머니에 넣고 손을 녹일 수 없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망할 눈, 망할 눈.

 

나는 눈 속을 걸으며 주위의 사람들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고통에서 신경을 돌리기 위해 억지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래, 그 동안은 눈을 이렇게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지. 눈으로 하는 놀이란 것은 대게 친구가 필요한 법이었고, 친구가 없던 나에게 눈이 즐거웠던 적은 없었다고 해도 좋다. 그래서 눈밭을 돌아다닌 경험도 적다.

 

나는 눈 속을 걸으며 주위의 건물들이 낮아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진 하늘은 어두웠고, 옆의 차도를 간간히 지나가는 차들은 모두 헤드라이트를 켠 채로 달리고 있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빛을 받은 눈송이들은 아름답기보다는 오래된 브라운관 TV의 화이트노이즈처럼 불길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난생 처음, 눈이 비로 바뀌는 순간을 보았다.

 

 

 

하얀 눈송이가 사라지고 회색 구름빛으로 물든 빗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야를 두고 있는 눈 위로 까만색이 한두 방울씩.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내 뺨 위로 눈송이가 아닌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 차거!”

 

깜짝 놀라 손을 들어 뺨을 닦아냈다. ? 비라고? 눈도 눈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비는 더 끔찍했다. 하지만 근처에 비를 피할만한 건물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길게 뻗어 있는 차도와 인도만이 나의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굵었던 눈송이는 바로 세찬 빗줄기가 되었다. 나는 도로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비를 맞았다.

 

그제야 오른 다리의 깁스에 신경이 갔다. 깁스 안에 물 들어가면 큰일인데.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목발을 움직이는 손을 더욱 빨리 했다. 비를 피할 곳이 없다면 최대한 빨리 집으로 향하는 수밖에.

 

하지만 비는 아까 함박눈이었던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제법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제아무리 서둘러봤자 깁스 안에 물이 안 들어가기는 무리였다. 병원에 다시 가려면 귀찮긴 하다만은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있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수고, 다시 해야지.

 

인간관계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상념에 잠긴 채로 목발을 내딛었을 때, 목발 끝에 달린 고무가 땅이 아니라 얼음을 짚은 듯한 느낌이 났다. 하지만 이미 그 쪽에 체중을 실어버린 후였다. 몸의 균형을 지탱해 주던 목발이 미끄러지며, 나는 손쓸 도리도 없이 바닥을 향해 쓰러지고 말았다.

 

크윽!”

 

설상가상으로 손은 목발을 붙잡고 있던 터라 어떻게 충격을 완화하려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눈앞이 번쩍이는 듯한 충격과 함께, 나는 돌바닥에 고인 자그마한 물웅덩이에 얼굴을 처박았다.

 

.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

 

빗방울이 내 전신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쓰러져 있는 동안 얼굴 쪽에서 쓰라린 아픔이 밀려올라왔다. 간신히 손을 들어 눈 밑을 쓰다듬어 보니 옅은 붉은색이 손 위로 배어나왔다. 찢어졌나. 눈이나 뼈가 안 다쳐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일어나야지.

 

나는 손을 더듬어 목발을 다시 손에 쥐려 했다. 하지만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튕겨 나간건지, 목발은 두 짝 다 약간 떨어진 곳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묘하게 떨어져 있는 거리가 근래의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두 팔로 땅을 짚고, 깁스를 하지 않은 다른 쪽 발로 혼자 일어섰다. 물에 젖은 눈이 미끄러웠다. 나는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비속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 때 옥상에서의 펜스와는 다르다. 나는 움직일 수 있고 움직이면 손이 닿는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리에 힘을 쥐고 뛰었다. 한 발, 다시 한 발. 그것만으로도 단숨에 목발이 있는 곳까지 왔다. 나는 안심하며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목발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한 발로 서 있으면서 허리를 굽힌 탓인지, 다시 한 번 볼썽 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교복이 흙탕물 투성이가 됐다.

 

나는 가드레일에 등을 기대고 간신히 잡은 한쪽 목발로 다른 목발을 끌어당겼다. 바닥을 구른 목발은 까만 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도로에 쌓여있는 먼지를 머금은 물이다. 나는 문득 힘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전신은 흠뻑 젖었고,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날씨가 따뜻해졌기 때문에 눈이 비로 변한 것 아닌가? 하지만 물에 젖어버린 교복은 눈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내 체온을 빼앗아 갔다. 그 잠깐 사이에 벌써 추위가 느껴졌다.

 

이미 바닥에 쌓여 있던 눈들은 세찬 비에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차도로 시선을 던지자 지나다니는 차들에 의해 밀려난 눈들이 가장자리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인도보다 훨씬 높게 뭉쳐 있던 그 눈들은 아직도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하얗지 않았다. 도로의 먼지를 잔뜩 머금은 눈은 새까맣다. 타이어에 밟히고, 도로에서 밀려나 한구석에서 서로 뭉친 눈은 깨끗함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비를 맞으며 우울한 눈길로 더러워진 눈 더미를 바라보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있었다면 내 꼴을 보고 비웃기나 하겠지. 안 그래도 비참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자제가 안 된다. 그 동안 쌓이고 쌓였던 자괴감이 폭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누군가 나를 필요하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누군가 나의 가치를 증명해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색이 바라지 않는 진짜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지금만 봐도 그렇다. 비와 눈, 그리고 먼지가 뒤섞인 흙탕물을 구르는 내가 있을 뿐. 저 차도 옆에 쌓인 눈처럼. 마치 쓰레기처럼.

 

그래, 그러니까 생명은 소중한 것이어야만 했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은 나름의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나도 무가치하지 않다는 뜻이 될 테니까.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확신하며 살고 싶었으니까, 나는 여태껏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거기에 몸을 던져 왔던 것이다. 나의 목표, 나의 지향점을 향해서.

 

혼자서도 완전한 전지전능의 초인.

 

유키노시타 유키노.

 

하지만 나는 내(八幡)가 아닌 눈(雪乃)이 될 수 없었다.

 

눈이 녹은 비가 흘러내린다. 눈이 되지 못한 빗방울들이 나를 세차게 두드렸다.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다.

 

왜 더 차갑지 못하느냐고.

 

"하아……."

 

나는 결국 한낱 나약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청춘이 싫다. 증오스럽다고 해도 좋다.

 

어린 내가 싫다. 깊은 무력감이 짜증스럽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내가 싫다. 이젠 지쳤다.

 

왜 나는 유키노시타처럼 될 수 없단 말인가.

 

나도 많이 힘들었다고. 유키노시타보다 더!

 

아아, 그래. 물론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서로의 불행을 비교하는 것이 꼴사나운 일이라는 것을. 악의에 의해, 불운에 의해 유린당했던 것은 자랑이 아니라는 것을. 게다가 나는 유키노시타가 무슨 일을 겪어 왔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내가 더 힘들었다고 말하는 건 웃기는 일이겠지. 그러면서 왜 나만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냐고 울부짖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힘들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되는 건 아니잖아?

 

이 순간에도 떠올리고 만다. 세계에 있을 온갖 불행을.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어리광일까. 오늘 한 조각의 빵을 먹으며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배부름일까. 더 큰 불행 앞에서는 더 작은 불행은 얌전히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것일까. 그래야만 미약한 자존심이나마 지킬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그 세계는 분명 이상하다.

 

그 세계에서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일 테니까.

 

그게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불행을 근거로 남을 비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남을 존중해 오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누구도, 히키가야 하치만이 대충 살아왔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게 아닌가? 내 삶을, 나 자신을 비웃고 부정하고 짓밟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 아닌가? 대체 누가 그렇게 나를 존중해 줬단 말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받아온 대접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열심히 살았다. 결과가 실패였을 뿐이지.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아무도 없다면 과거 나의 모든 노력은 결국 의미가 없게 되잖아.

 

의문이 쌓여나간다. 지식과 경험이 충돌을 일으킨다. 나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묻고 싶다. 이런 모순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는 리얼충들에게.

 

정말로, 모든 생명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웃기지 마! 나는……나는……!"

 

나약해지려는 자신 속에 쌓여있는 분노를 토해내려 해도, 말이 이어져 나오질 않는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으니까.

 

눈물이 내렸다.

 

누군가 비를 밟는 듯한,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오고 있나? 그 전에 일어나야 할 텐데. 그러나 추위와 빗줄기에 얼어붙은 몸은 생각대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바로 근처에서 멈췄다. 그리고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비나 히나가 가슴에 손을 얹은 채 빨간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다만 우산은 들고 있었을 뿐, 비를 막는다는 본분에는 그다지 충실하지 못했다.

 

자그마한 발을 감싼 귀여운 디자인의 갈색 스니커즈는 온통 얼룩이 져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한 머리카락 끝에는 물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빨간 테 안경의 렌즈에는 물이 묻어서 에비나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에비나가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가, 오길래, 혹시나 해서…….”

 

에비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은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에비나는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혹시나 해서 찾아다녔는데, 진짜 있을 줄이야! 미쳤어? 다리도 다친 놈이 뭘 잘났다고 혼자 빗속을 걷고 있는 거야아아!”

 

에비나의 고성이 내 귀를 찔렀다.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욱 아파오는 것만 같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차가운 귀를 어루만졌다.

 

…….”

히키타니, 날 죄책감으로 죽게 만들려는 거야?”

 

에비나는 살기가 등등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나오니 변명할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비나는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무리 이미 젖었다고, 우산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나? 의아해하는 나를 향해 에비나가 다가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나를 꼭 끌어안았다.

 

?”

 

너무 순간적인 일이라 당황했다. 얼어붙은 몸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코앞에 있는 에비나의 머리카락이 머금은 물의 냄새와 물방울이 구르고 있는 새하얀 목덜미가 나에게서 말을 빼앗아 갔다. 에비나는 내 반응을 완전히 무시한 채 나와 몸을 완전히 밀착했다. 그리고선 힘을 줘서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켰다.

 

에비나의 몸에 기대 일어난 나는 황급히 몸을 빼려 했다. 하지만 에비나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천천히 나를 부축해, 가드레일 위로 몸을 기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가드레일을 손으로 잡고 몸을 지탱하게 된 후에도 에비나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저기, 일으켜 준 거, 되게 고맙거든. 그러니까 일단 떨어지는 게 낫지 않겠냐. 이러다 딴 애들이 보면 너도 곤란하다니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최대한 굴려 평소와 같은 변명을 짜냈다. 앞에 보이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귓가를 향해서.

 

에비나는 그제야 천천히 내 몸을 감싼 팔을 풀었다. 그리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그마한 입술이 열렸다.

 

그런 걱정은 접도록 해, 히키타니. 남의 평판보다는 자신의 몸을 걱정해야지.”

 

에비나는 비를 맞으며 옆에 떨어져 있는 목발을 집어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목발을 받아들어 다시 양 손에 장비했다. 신은 말했다.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니라고. 그러니 가장 좋은 장비로 부탁해.

 

내 내면의 말을 들은 건지 우산을 다시 집어든 에비나가 나에게 말했다.

 

집까지, 우산 씌워줄게.”

……그래. 그리고 그걸로…….”

끝 아니니까 입 좀 다물어줄래? 내가 사브레라는 강아지만도 못하니? 기분 나쁘거든?”

 

날카로운 에비나의 반응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에비나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끝내고 싶으면 하야토랑 같이 내 만화의 끈적끈적한 모델이 되어주시던가. 물론 적나라한 알몸으로!”

 

그보다 싫은 일은 세상에 있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부디 집까지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에비나는 그제야 살짝 웃으며 우산을 높이 들어서 내 머리 위로 올렸다. 나에게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가 그치고, 대신 빗방울들이 팽팽한 우산 표면을 두들기는 소리가 리듬감 있게 들려왔다.

 

그런가. 내가 코마치한테 우산을 씌워줄 때랑은 상황이 다르구나. 나는 팔을 높이 올리고 있는 에비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렇게 손을 죽 뻗고 있으면 가슴 부분이 존재감을 드러내서 곤란하다. 게다가 에비나, 우산 쓰고 있던 주제에 왜 이렇게 많이 젖어 있는 거야. 속옷 다 비친다고.

 

나는 가드레일에 기댄 몸을 내밀고, 다시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에비나는 빨간 우산을 들고, 내 머리를 비로부터 보호하며 나를 따라서 걷고 있었다. 키 차이도 있는데다가 목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좀 떨어져서 걸어야 했기 때문에 에비나 자신은 거의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새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에비나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설득할 수는 없겠지. 나는 말없이, 정확하고 빠르게 목발을 움직였다.

 

집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 코마치가 장화를 신고 파란색 우산을 쓴 채로 현관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에비나를 발견한 코마치는 쪼르르 달려와 내게 화가 난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오빠! 진짜,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 걱정했잖아! 게다가 혼자 올 거면 택시라도 탔어야지! , 이거 코마치 기준으로 포인트 높았지?”

뒤의 말이 포인트를 까먹는다는 사실을 이제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문이나 열어.”

, 근데 상상하던 거랑은 사뭇 다른 풍경이……당연히 오빠는 혼자 터덜터덜 걸어올 줄 알았는데……히나 언니?”

 

코마치는 신기하다는 눈길로 내 옆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에비나를 바라보았다. 에비나는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을 흔들며 코마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하하. 안녕? 히키타니가 혼자서 무모한 짓을 하고 있길래, 잠시 도우미 역할 좀 했어.”

이야, 이거 정말 감사하네요! 일단 들어오세요! 옷이라도 말려드릴게요!”

고마워. 신세 좀 질게.”

 

에비나는 우산을 접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축축한 스니커즈를 벗자 까만 스타킹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 젖는 거 신경 쓰지 마시고 그냥 들어오세요. 어차피 닦으면 되니까요.”

 

코마치는 재빨리 욕실로 뛰어 들어가서 마른 수건을 두 장 꺼내와 나와 에비나를 향해 던졌다. 에비나는 허공에서 펄럭거리는 수건을 솜씨 좋게 잡아채 나에게 하나를 건넸다.

 

일단 그걸로 몸 닦고 계세요!”

 

고개만 빼꼼 내민 채로 그렇게 말한 코마치는 바로 다용도실로 가서 모아둔 신문지를 꺼냈다. 신문지를 잘게 찢어서 동그랗게 뭉친 후, 나와 에비나가 신고 있던 신발 안에 꾹꾹 집어넣으며 말했다.

 

히나 언니. 욕조에 미리 따뜻한 물 받아놨는데, 목욕하세요. 그 사이 옷들은 빨아서 건조해 드릴게요. 이런 겨울날에 비 맞고 걸어가다간 쓰러지기 딱 좋죠.”

, …….”

 

에비나는 살짝 당황해하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얼굴도 살짝 달아올라 있다. 하긴, 동급생 남자 집에서 갑자기 목욕을 하라는 말을 들어도 좀 그렇겠지. 하지만 코마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걱정마세요! 오빠가 걱정이라면 제가 철벽으로 막아 드릴게요! , 혹시 반대를 원하시면 강제로 밀어 넣어 드려요!”

, 앞의 걸로 부탁해…….”

 

하지만 코마치의 말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이런 날씨에 물에 젖은 채로 장시간 밖에 있다간 며칠 앓아 눕기 십상이겠지. 이 이상 쓸데없는 빚을 지는 것은 사양이다. 나는 에비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난 내 방에 들어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을 거니까.”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에비나는 뭔가 불만인듯 입술을 비죽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날카롭게 캐치한 코마치가 사이에 난입했다. HERE COMES A NEW CHALLENGER 같은 느낌이다.

 

그래, 오빠. 오빠는 커피를 끓여야 하니까 방에 들어가 있으면 곤란해. 두 잔. 알았지? 나랑 히나 언니 거.”

……나는?”

에이, 의사 선생님이 먹지 말라고 했잖아. 코마치는 오빠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어. , 이것도 코마치 기준으로 포인트 높지?”

 

나는 포인트를 말소하고 싶은 심정으로 코마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코마치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에비나가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었다.

 

그럼, 먼저 신세 좀 질게.”

그래. 옷은 바구니에 넣어서 코마치한테 맡겨 두고……. , 교복 블레이저 재킷은 세탁기가 아니라 드라이클리닝을 맡겨야 되던가. 이 근처에 빨리 해주는 데가 있나?”

하루 만에 바로 해주는 데는 없을걸? 일단 신문지로 덮어 둘 테니까, 나중에 꼭 세탁소에 맡기세요, 언니.”

 

그렇게 말하며 코마치는 능숙한 손길로 에비나의 블레이저 재킷을 벗겼다. 그리고선 구겨지지 않도록 잘 펴서 신문지 위에 올려놓은 후에 그 위에도 신문지를 덮었다. , 내 건 해놓을 필요 없겠지. 바로 밖에 입고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이따가 세탁소에 맡기는 걸로 충분하다. 에비나는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생활력이 충만하구나.”

부모님이 바쁘시다보니. 여튼 히나 언니, 빨리 들어가서 씻으세요. 젖은 채로 있으면 감기 걸린다니까요?”

 

코마치는 에비나의 등을 밀면서 강제로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안에서 욕실 문을 어떻게 잠그는지에 대한 꼼꼼한 설명이 들려왔다. 그럼 나도 슬슬 내 방으로 가보실까. 어찌 됐건 옷을 벗고 몸을 닦은 후에 갈아입어야 하니까, 거실에서는 무리다. 커피는 조금 있다가 끓이도록 하자.

 

나는 코마치가 꺼내준 수건을 집어 들고 목발을 짚으며 내 방으로 향했다.

 

 

 

 

여자애들의 목욕 시간에 경이감을 느끼며 커피를 끓이고 있을 무렵, 욕실 문이 열리고 에비나가 밖으로 나왔다. 안 보는 척 슬쩍 시선을 돌리자 몸에 걸치고 있는 건 이미 안 입게 된 내 파자마였다. 깨끗하게 빨아서 코마치한테 넘겨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입고 나올 줄이야.

 

에비나는 상기된 얼굴로 소매를 손가락 끝으로 집고 있는 손을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 옷은 좀 크겠지.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끓고 있는 커피포트를 바라보았다. 에비나의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히키타니, 흥분되지 않아? 여자애가 히키타니 옷을 입고 있는 건데. 혹시 정말로 호모라면 언제든지 말만…….”

 

나는 소름 돋는 에비나의 발언을 단번에 자르고 들어갔다. 이 여자, 안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 그런 걸로 거리낄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그 옷은 이미 세탁에 소독까지 끝낸 거라고. 그리고 네가 가면 다시 세탁에 소독까지 끝낼 거야.”

에이, 소독까지는 너무해.”

아쉽게도 우리 집 세탁기는 그 모든 과정이 일체형이라서.”

 

빨래가 꽉꽉 들어차 있지 않은 이상 세탁 시작부터 건조 완료까지는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현대의 가전제품은 리림이 낳은 문화의 극치……. 이런 기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잠시 히라츠카 선생님을 위한 묵념을 올린 후에 머그컵을 꺼내 커피믹스를 넣은 후 커피포트를 들어 끓는 물을 부었다. 연한 갈색의 액체가 향긋한 향을 풍겼다.

 

이쯤 되면 히키타니의 방어벽에는 경이가 느껴질 정도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빨리 누가 박살내면 좋을 텐데. 언니는 어떠세요?”

 

코마치가 쟁반을 든 채로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나는 두 잔의 커피를 코마치가 내민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코마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두 개의 머그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거실의 소파로 향했다.

 

으음. ? 노력해 볼까? 괜찮아, 코마치?”

얼마든지요. 저로선 적극 환영이에요!”

 

에비나는 코마치가 내민 쟁반에서 머그컵을 받아들었다. 두 손으로 머그컵을 조금씩 홀짝거리며, 에비나는 말했다.

 

히키타니는 내버려 뒀다간 혼자서 죽어버릴 것 같으니까.”

 

, 그렇겠지.

 

오늘만 해도 생각이 꽤나 아슬아슬한 곳까지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언젠가 이 상황을 버티지 못하게 되는 날이 분명 찾아오고야 만다. 그 때 내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제로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 때 갑작스레 코마치가 손을 들고 에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요.”

?”

히키타니는 올해의 별명인가요?”

 

코마치의 질문에 에비나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해설을 요구하는 듯한 그 눈빛에 나는 바로 정답을 공개하기로 했다.

 

내 이름은 히키가야 하치만이라고. 쟤는 히키가야 코마치.”

어라?”

 

머그컵을 쥐고 있는 에비나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그리고 직후, 에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알고 있었어! 히라츠카 선생님이 몇 번 부르는 걸 듣기도 했고!”

그러냐…….”

 

아니, 아무리 봐도 전혀 몰랐잖아. 내 심정을 눈치 챈 건지 에비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머그컵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미안……. 하지만 히키타……히키가야는 히라츠카 선생님이랑 상당히 친한 편이잖아. 그래서 별명 같은 걸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는걸.”

 

물론 선생님이 때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는 선생님 외의 다른 사람에겐 맞을 생각이 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잘 되새겨봤으면 좋겠다. 아무리 봐도 친한 건 아니잖아. 때리고 맞는다니, 콜로세움이냐고.

 

아뇨,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오히려 히키타니 정도면 역대 오빠를 부르는 호칭 중에서 순위권을 노려볼 정도로 양호한 별명인데요? 금메달도 가능!”

 

코마치가 웃으며 에비나를 위로했다. 내용을 부정할 수 없는 내 자신이 슬프다. 그래, 뭐 한자 하나 잘못 읽은 것 정도는 아무 문제없지. 적어도 나를 제대로 인식은 하고 있잖아.

 

알면서도 방치하는 녀석들도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거 유이 얘기?”

유이가하마 말고도 있지.”

 

절대로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녀석이 말이야. 에비나는 이미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F반에서 내 인간관계라고 해 봐야 대단히 좁다. 그 중에서 특정한 인물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려울 일이 아니겠지.

 

에비나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몇 번이나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 때, 세탁기의 건조가 끝났다는 알람이 땡하고 울렸다.

 

, 옷 다 말랐네요! 가져다 드릴게요!”

 

나는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에비나가 그런 나를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히키가야?”

갈아입는 데 내가 있으면 불편하잖냐. 나갈 때는 불러라. 배웅할 테니까.”

 

러브코메디적인 전개는 유비무환의 자세를 갖추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다. 나는 에비나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잘 마른 교복을 갖춰 입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비나가 돌아가겠다는 말을 꺼내고, 나는 그 배웅을 위해 현관 앞에서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 에비나가 나에게 말했다.

 

히키가야. 질문이 하나 있어. 솔직하게 대답해 줬으면 해.”

뭔데?”

앞에,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어쩔래?”

 

그건 사브레를 말하는 것일까, 에비나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 츠루미 루미나 사가미 미나미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행동에 비추어 봤을 때 어색하지 않을 대답을 지어냈다.

 

귀찮지 않은 선에서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줄 수도 있겠지.”

그래?”

 

에비나도 내 말의 진위 자체는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 이렇게 속내를 바로바로 읽힐 정도로 티가 나나. 예전엔 안 그랬는데. 진짜 요새 들어 정신이 많이 지쳤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있잖아. 히키가야랑 나는 분명 어딘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해.”

 

에비나가 문을 열자, 차갑고 습한 공기가 집 안으로 밀려들었다. 투툭거리는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 순간의 변화가 깊은 인상을 남겨, 에비나의 말을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도 아마 그렇게 할 거야.”

 

웃음기 없는 단호한 표정으로, 에비나는 나에게 손가락을 겨눴다. 비와 뒤섞인 새하얀 입김이 초연처럼 뒤에서 피어올랐다. 마치 총이라도 쏘려는 것처럼. 에비나는 천천히 그 손가락을 당겼다.

 

“BANG!”

 

손을 내리고, 에비나는 배시시 웃으면서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선 홀가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각오하고 있어.”

 

무엇을 각오하란 말인가. 쓸데없는 기대를 하게 만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물론 에비나가 호의로 이러는 걸 짐작하지 못할 멍청이는 아니다. 다만 그 호의가 계속될 거라고는 믿을 수 없다. 그건 내가 다쳤기 때문에 생겨난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3턴이 지나면 사라지고 만다.

 

짧은 시간 동안 유지될 임시적인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으랴. 나는 그 뒤에 닥쳐올 허망과 허무를 견뎌낼 자신이 없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라도 그러한 경험을 버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법안을 만들어 아주 짧은 행복, 그 뒤에 긴 허탈감을 초래하는 행위들을 금지시켰다. 도박이나 마약과 같은 행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에비나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안경과 닮은 새빨간 우산이 자그마한 몸을 가렸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로, 에비나는 내게 작별의 말을 건넸다.

 

그럼 히키가야, 내일 또 보자.”

 

재회를 약속하는 말이기도 한 인사를 곱씹으며, 나는 문에 몸을 기댄 채 멀어져 가는 빨간 우산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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