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_06(完)

해가 없는 방정식

 

거울에 비친 듯한 두 사람

 

좁혀지지 않는 77센티미터의 거리

 

교점이 존재하지 않는 끝없는 평행선

 

아무리 궁리해도 답을 낼 수 없는 문제

 

풀리지 않는 수학 시험지를 닮은 그 관계를

 

나는 어떻게 해도 웃으면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최종화

 

 

 

 

바람이 불지 않는 겨울의 운동장은 낮은 기온에도 불구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녀석 앞에서 추위로 달달 떨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애써 표정을 지우며 하야마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토베에게 고백해보라고 옆에서 바람을 넣은 거, 너지?”

, 맞아.”

 

시원스레 수긍하는군. 자신에게 약점이 되지 않으니 아무런 부담이 없다. 그러니 인정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 자신만만함이 불쾌하다.

 

하야마는 들고 있던 테니스공을 나를 향해 가볍게 집어던졌다. 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초록색 공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렸다. 땅에 몇 번 튕긴 테니스공은 쪼르르 굴러 정확하게 내 앞에서 멈췄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하야마가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거기엔 나를 눌렀다는 성취감도, 나에게 도움을 줬다는 우월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혀를 찼다.

 

탐정 흉내는 관심이 없는데?”

 

내 역할은 관객일 뿐, 탐정도 선생도 아니다. 하야마에게 해설을 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하야마는 태연하게 나에게 그 역할을 요구했다.

 

말해주지 않겠어? 정답 확인은 해야지.”

 

낭랑한 하야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침묵했다. 그리고 하야마도 그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여유로운 태도로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선 나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 없이 인적이 없는 운동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사건의 인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해설을 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하야마 역시 이곳에 올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둘 다 무의미한 짓을 할 거라면, 확인이라도 하는 게 낫겠지.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고백부터가 이상하지.”

그래?”

 

하야마의 반문에는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토베의 고백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거창했어. 정말로 자신의 마음에 매듭을 짓는다는 의미뿐이었다면 에비나를 따로 만나서 고백을 하면 충분했을 거야. 그렇게 전교의 관심을 끌어 모으려는 것 마냥 거창하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라면집에서 있었던 토베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직접 에비나의 마음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 물론 그런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겠지만 그 의도만으로 그 고백의 거창함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거창한 일에는 그에 걸맞은 준비 기간이 필요하지. 그날 토베는 유별나게 타이까지 제대로 메고, 사물함에는 장미꽃까지 준비해 놨었다. 그걸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변의 인간관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하야마 네가 모를 수는 없어.”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잖아?”

 

말도 안 되는 대꾸에 순간 나는 화가 치밀어 차갑게 되물었다.

 

그래서, 몰랐나?”

아니, 알고 있었는데. 꽃은 내가 사다준 거기도 하고.”

 

망할 놈. 그 능글맞은 얼굴을, 상쾌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집스레 시선을 전방으로 고정했다.

 

그렇다면 너는 이 사태를 알면서도 방치했다는 뜻이 된다. 막을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수학여행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왜 그렇게 바뀌어 버린 걸까?”

 

굳이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답은 뻔했으니까. 하야마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목표가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토베는 이미 에비나의 마음을 들었어. 내 고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모두가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거기서 넌 생각했을 거야. 그렇다면 이미 리스크는 충분히 적어진 게 아닐까? 여기서 토베가 다시 한 번 고백을 한다 한들, 너희들 일곱 명의 관계는 무너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나는 추궁하듯 말을 이었다. 점점 말에 열기를 더해 간다.

 

거기에 더해서, 미리 당사자들이 알고 있기만 하다면야 더할 나위 없고.”

 

하야마라면, 미리 그들을 설득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겠지. 게다가 그 일곱 명은 고백이 성사되지도 않은 주제에 모두들 토베가 에비나에게 품고 있는 마음을 알고 있었다.

 

리스크는 낮고, 리턴은 높다면 참 해볼 만한 일이 될 테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문제로 목표를 돌릴 수 있었던 거지.”

 

결국 상황을 정리해 보면 간단하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미우라도 에비나도 유키노시타도 아닌 하야마였을 뿐.

 

수학여행 때, 내가 움직일 거라는 사실을 미리 예측하고 나에게 죄책감을 품었던 단 한 사람의 존재는 누구였는가.

 

그 후 혼자서 나를 찾아와 나에게 선전포고를 던지고 간 사람은 누구였는가.

 

미우라에게 조력을 요청했을 때, 미우라가 받아들일만한 단 한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그 이후로 그룹에서 활동하지 않고 F반 전체를 혼자서 돌아다니던 사람은 누구였단 말인가.

 

토베와 에비나를 모두 알고, 설득하고, 최상위 그룹 7명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 모든 일이 가능한 사람은 소거법으로 하야마 하야토 뿐이다.

 

그래서 너는 토베를 부추겨 고백을 하게 했다. 아마도 에비나한테도 말해 뒀겠지. 그리고 그 고백으로 전교의 이목을 쓸어 모은 거다. 최대한 크고 화려하게.”

 

나는 잠시 숨을 돌렸다.

 

분명 그건 효과가 있는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결국 토베와 에비나를 소문의 대상으로 던져놓고 사태를 회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야마 하야토라는 인간에게, 히키가야 하치만이라는 인간에게 그래도 될 자격 따위가 있을 리 없다.

 

분노와 짜증으로 범벅이 된 머릿속은 하얗게 타올랐다. 논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고, 모든 사고의 흐름이 폭력으로 흐르려 했다. 나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하야마에게 물었다.

 

그러니 네게 물어봐야 할 게 있는데.”

뭔데?”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이런 짓이라고 한 건, 토베에게 고백하라고 했던 그거 말하는 거야?”

그래.”

 

결국 하야마는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섞인 그 소리가 머리를 약간이나마 차갑게 식혀주는 것만 같았다.

 

옆에 있던 하야마가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하는 소리와 함께, 하야마는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몸을 숙이며 말했다.

 

히키가야. 네 추리엔 60점을 주겠어.”

?”

시작이 틀려서 20점 감점, 그 뒤가 없어서 20점 감점.”

 

허리를 굽혔다 편 하야마의 손에는 내 앞에 떨어져 있던 테니스공이 들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야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는 하야마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선량한 몇 사람의 희생으로 사태를 틀어막고, 문제를 해소했다고 안도하며 넘겨 버리는 건 지금까지 네가 해왔던 것과 뭐가 다르냐고. 말했을 텐데? 나는 그런 방식을 인정할 수 없다고.”

 

문화제 때의 기억이 겹쳐진다. 내 멱살을 붙잡은 채 나를 벽에 밀어붙이던 하야마의 표정이 지금의 얼굴 위로 오버랩된다. 그때와 같은 적의를 담은 채, 하야마는 나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런데 너는 대체 왜, 그걸 알면서도 거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

내가 토베에게 부탁했을 것 같아? 2학년 끝날 때까지 너를 대신해서 놀림거리가 되어 달라고?”

 

하야마 하야토가 그 동안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했던 이유.

 

그 누구도 상처입지 않기를 바라는 안이한 사고방식.

 

확실히 여태껏 봐 왔던 하야마의 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번 일은 이상했다. 애초에 내가 열을 냈던 이유도 히키가야 하치만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고작 그런 이유로 토베를 희생시킨 하야마의 행태에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하야마의 말은 내 짐작이 충분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건 아니겠지.”

그래. 알잖아?”

 

하야마가 시니컬하게 웃었다. 알긴 뭘 아냐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말을 아꼈다. 결국 이 녀석은 나와 방향이 다를 뿐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극한다. 친하게 지낼 수가 없다.

 

그럼 설명해봐.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토베는 시작일 뿐이야.”

 

내 질문에 하야마는 즉답했다. 그 기세에 잠시 눌려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하야마는 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F반 교실이 있는 곳일까. 가상의 직선을 허공에 죽 그어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동안, 나는 우리 반을 돌아다니면서 상담이랄까, 그런 일을 하고 있었지. 굳이 우리 반만은 아니야. 내 발길이 닿는 곳 거의 다.”

 

하야마 하야토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는 쪽이 더 빠르겠지. 마음만 먹으면 학년간의 경계도 무시한 채로 돌아다녀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이미 지난 번 문화제 때 학생회 때의 멤버 몇 명의 태도로 확인한 바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본인들은 아무리 숨길 생각이라고 해도 티가 나게 마련이지. 주로 그런 애들이 대상이었어. 토베와는 다르게, 가능성이 충분한 애들이라고 해야 할까.”

 

하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하야마의 계획이라는 것을, 내가 짚지 못한 뒷이야기에 대한 내용을 직감했다. 나는 내 예상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했다.

 

고백이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애들이라는 거냐?”

이해가 빠르네.”

 

하야마는 쥐고 있던 테니스공을 살짝 던져 올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떨어지는 테니스공을 강하게 걷어찼다. 과연 축구부 주장이라고 해야 할지, 하야마의 발에 얻어맞은 테니스공은 운동장 저편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전력을 다해서 그 애들이 화려하게 고백하게 만들 거야.”

 

하야마는 고개를 돌려 테니스공이 사라져 간 운동장 저편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 서 있는 하야마의 등이 만들어낸 그림자 속에서 나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걸 계속하란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하야마는 몸을 회전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이 학교를 그치지 않는 스캔들의 폭풍 속으로 내던지겠어. 토베가 네 존재감을 지워주기 위해 희생을 했다고 생각해?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게 네 해결책이냐?”

 

나는 차가운 목덜미를 매만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야마가 다시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시선을 마주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면…….”

 

선택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한다. 아무리 한 명의 개인이 완성되고 훌륭한, 전인이나 철인에 가까운 존재라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살아가는 궤적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세상은 이론적으로조차 불가능하다.

 

……반대로 하는 수밖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대중의 관심을 나눠서 진다. 악의를 분산시킨다. 그 결과 하나의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미미한 것이 된다. 계란판 위를 걷거나 바늘 침대에서 자는 묘기와 마찬가지인 이치다.

 

실패로 끝난 고백은 실패로 끝난 고백으로 덮고, 또 다시 뒤이어 성공한 고백으로 덮는다. 그리고 그걸 무한히 반복한다. 우리들의 2학년이 끝나갈 때까지. 화젯거리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대중의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하고 아무리 선명하더라도 곧 희미해지고 만다.

 

그것이 설령 히키가야 하치만이라는 비난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건……하야마에게 있어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지. 축구부 주장으로서, 반의 의견을 이끄는 리더로서 하야마가 쌓아온 리얼충적인 커리어는 소부 고등학교 내에서 비견할 자를 찾기 어려운 독보적인 것이다. 리얼충들의 관계가 기만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짓투성이라고 해도 그 효과가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다.

 

하야마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 말이 마치 나를 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는, 노력을 부정하겠지만.”

 

하야마가 허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하야마가 믿는 노력의 힘을 나는 줄곧 부정해 왔다. 그런 것에 의미는 없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실패는 실패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를 비웃듯 노력으로 되지 않았던 일들을 몇 번이나 그 앞에 들이밀어 왔다.

 

세상 모든 일이 어려운 이유는 뭘까. 노력만 하면 된다던가, 노력을 해도 안 된다거나하는 걸로 설명이 된다면 참 쉬웠겠지. 결국 그 둘이 섞여 있으니 어려운 거야. 미래를 알 수 없는 선택을 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운 거라고.”

 

하야마의 말투에 열기가 담겼다. 거기엔 내가 지금껏 쌓아온 부정적인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분노,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한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뼈저리게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임간 학교 때 루미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어. 문화제 때 사가미를 제 시간에 데려갈 수 없었어. 수학여행 때 토베를 말릴 수 없었어!”

 

지금까지 하야마 하야토는, 그가 가지 못하는 길을 가는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바라봐야만 했지. 그 모든 일을 냉정하게 처리하는 너를 말이야.”

 

그것은 필경 그에게 있어 굴욕이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다.

 

나도 지금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까.

 

지금은 단지 그 반대일 뿐이야.”

 

하야마는 씹어 내뱉듯 나에게 말을 던졌다. 나는 거기에 아무런 반론도 할 수 없었다.

 

네가 할 수 없는 걸, 나는 할 수 있어. 그 반대가 마찬가지인 것처럼.”

 

이것이 하야마가 내놓은, 나의 거짓말을 인정하지 않는 해답.

 

히키가야 하치만이 절대 가지 못하는 길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반론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하야마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남았냐? 나는 흠칫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시작도 틀렸다고 했지.”

……그래.”

토베와 에비나는 내 계획에 들어있지 않았어. 내가 뭘 하려는지 먼저 눈치 채고 찾아온 거야. 적어도 그 고백에 있어서는 나는 그냥 방관자였지. 그저 옆에서 약간 도움을 줬을 뿐이라고. 그리고 유키노시타도…….”

 

유키노시타의 이름을 말하던 하야마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나를 바라보지 않던 하야마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그런 얘기까지 네게 할 필요는 없겠지.”

 

하야마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뗐다. 수학여행 때, 강가를 떠나는 나를 향해 하야마는 그렇게 말했다. 너에게만은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고.

 

피차, 마찬가지다.

 

나는 패배감을 곱씹으며, 멀어져 가는 하야마의 등에서 눈을 돌렸다.

 

 

 

 

 

 

황혼 무렵의 운동장은 붉었다.

 

하야마가 가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흐릿해진 감각이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를 잡아냈다. 하야마에 비해 한결 가벼운 소리. 언젠가 저 소리를 들었던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익숙한 향기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에비나 히나는 나에게 등을 기댔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에 일말의 온기가 스며들었다. 그 따뜻함에 무심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반응에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히키가야.”

?”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냥, 좀 쉬는 중이었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화면을 켜니 이미 부활동도 다 끝나갈 시간이었다. 겨울에 밖에서 교복만 입고 뭐하는 짓이었는지.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목발을 잡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 때 에비나의 말이 나를 잡아 끌었다.

 

으음. 우리, 거짓말 하지 말자. 특히나 서로가 단번에 눈치챌만한 거짓말은 말이야.”

 

나는 목발로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무의미하잖아? 시간 낭비니까.”

……그래.”

 

무의미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데는 공감했다. 쓸데없는 낭비를 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를 절약하며 사는 태도에는 분명 배울 점이 있다.

 

근데 히키가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 누군지 안 궁금해? 안 물어볼 거야?”

 

내가 목발을 포기하고 손을 당기자마자, 에비나는 대뜸 그렇게 물어왔다. 나는 사건의 인과 관계를 고찰한 나의 추리를 들려주기로 했다.

 

수학여행 때는 없다고 했다가, 지금 생겼다면 그 사이에 인식이 변할만한 인물, 혹은 그 사이에 새로 만난 인물이겠네. 당장 떠오르는 건 토베 정도로군. 하지만 토베는 아니라고 못을 박았으니 나로선 잘 모르겠는데.”

와아……, 모르는 척은 정말 재주 있네, 히키가야.”

 

실망한 듯한 에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피어오르려 하는 일말의 기대를 애써 몰아내며 말했다.

 

모르는 척이 아니야.”

?”

아무리 그런 확신이 들어도, 그런 예감이 들어도, 마지막에 가면 언제나 틀렸지. 세상은 언제나 내가 알지 못하는 조건과 변수로 가득해. 그걸 신뢰하는 것은 결국 어리석은 짓이야.”

 

개인의 주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야를 어둡게 하는지 나는 똑똑히 체험해 왔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것 뿐.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내 판단엔 실수가 늘어가고 끝내는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갈매기의 꿈을 꿔야만 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라. 마침내 내가 사는 풍경을 부감할 수 있는 곳까지.

 

그럼, 제가 지금부터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겠습니다.”

하아?”

 

나의 삶의 경험이 담긴 각오를 비웃듯, 에비나는 말을 꺼냈다. 너무나 기가 차서 나는 뒤에 등을 기대고 있는 에비나를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에비나의 다음 말이 더 빨랐다.

 

히키가야. 나는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해.”

그럼 아닐지도 모르잖아.”

…….”

 

무심코 대꾸하고 말았다. 내 즉각적인 반론은 예측하지 못한 것인지 에비나가 당황하며 침을 삼켰다. 짧은 침묵이 이어지고, 풀죽은 듯한 에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게, 여태껏 누굴 제대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는걸.”

 

에비나가 머리까지 내게 완전히 기댔다. 머리카락과 머리카락이 섞여드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에비나가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머리를 타고 진동으로 느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있어본 적이 언제였지. 그리고 더욱 신기한 건 그 거리를 별로 불편해 하지 않는 자신이었다.

 

게다가 히키가야라면 알 거 아니야? 그때도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내가 누군가와 사귀어봤자 잘 될 리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뭐가 달라?”

으음. 여태껏 나는 나를 싫어했는데.”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 에비나가 흘리듯 던진 그 말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까닥거리는 내 움직임을 느낀 건지 에비나가 잠시 키득거렸다.

 

이젠, 조금 좋아해 보려고 해.”

 

무언가 머뭇거리는 기색이 등 뒤로 느껴졌다.

 

그리고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게 본론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무리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없어.”

 

분명 나는 나를 좋아하는 부분들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금세 포기할 수 있는 가벼움,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쿨함,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외로움. 하지만 그 요소들을 갖추게 된 나의 배경만큼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패잔병에게 수여된 훈장과 같은 것이니까.

 

내가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었다면, 수학여행 이후의 겨울을 그토록 힘들어하지 않았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를 좋아할 수 없는 나조차도 싫어하게 된다. 끝이 없는 악순환.

 

으음. 그래도 괜찮잖아. 내가 좋아하니까.”

 

하지만 그런 나를 에비나는 긍정하려 한다. 그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토베와 같은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의 결여를 마주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 빛이 싫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뀌긴 힘들 테니까.”

내 의견은 무시냐…….”

일단은, 서로를 좋아해 보면 안 될까?”

 

중간에 들어간 내 반론을 깔끔히 무시한 채, 에비나는 무시무시한 제안을 했다. 처음에 불가능한 제안을 한 다음에 본론을 꺼낸다. 사기꾼들이 자주 써먹는 수법이지. 아버지에게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에 잘 안다.

 

나는 썩었으니까. 그러니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해. 내 옆에서 나를 읽고 나를 잡아줄 수 있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동류가. 그런 거울을 앞에 두고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에비나는 말끝을 흐렸다. 뒤에 이어질 말은 분명 희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 희망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걸 강조하는 것이 기만이 되리란 사실을 알기에, 그걸 내가 부정할 것을 알기에 에비나는 말하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둘이 서로를 잘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만은 너무나 명확한 것 같다.

 

에비나 히나는 히키가야 하치만이 필요해.”

 

에비나 역시 그런 결론에 이른 모양이었다.

 

, 노력해 볼게. 히키가야가 나를 좋아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좋아할 수 있도록.”

나는…….”

그러니까……같이 살아가자.”

 

에비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을 제대로 분간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의견을 반박했다.

 

웃기지 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어.”

? 이유나 들려줘.”

결국 그런 건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야. 시간이 지나면 흩어지고 사라져 버리…….”

, 그래서?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히키가야의 진면목을 알게 되고, 그래서 히키가야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진짜, 날 너무 우습게 보네.”

 

에비나가 화가 난 어조로 내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아직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건 나거든? 거기에 히키가야가 있을 자리 없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나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히키가야는 세계가 멸망할 그 순간까지 빛이 바래지 않는 관계를 원해?”

그런 건 없어.”

그래, 너무 길잖아.”

 

에비나가 일어섰다. 맞닿아 있던 등이 떨어지고, 곧 차가운 공기가 거기에 고여 있던 미약한 온기를 날려버렸다. 에비나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온 힘을 다해 꽉 쥐고 있는 손이 부담스러웠다.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에비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정도라면 딱히 어려울 일도 아니야.”

 

만 년을 가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없으니까 사람들은 그리 애달프게 유통기한을 노래하는 거겠지. 그만큼 현실성을 체감하기 힘든 숫자다. 말도 안 된다.

 

그래서 그 앞에서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은 가능할 것이라 착각하고 만다. 이건 사기꾼의 수법이다. 나는 이미 이걸 배워서, 당해서 알고 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말할게. 알아들을 때까지 말할 거야. 나는 너를 좋아해.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에비나가 내 앞에 섰다. 좋아, 그렇다면 이제 말하면 된다. 이런 사기극에는 질렸다고, 이제 헛소리는 그만하라고 말하면 된다.

 

논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에비나가 꺼내놓은 논리는 말도 안 되는 감상적인 것이며 거기에는 그래야만 하는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에비나가 타인이었다면, 이게 내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이를 깨부수는 논리를 백 개도 넘게 짜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말이 되어 나오지는 않았다.

 

분명 그녀 역시 익숙하지 않을 텐데도, 그걸 꺼려할 텐데도, 굴하지 않고 올곧게 호의를 말하는 그 눈을, 에비나의 투명한 눈을 보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에비나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가슴께에 살포시 모아 쥔 주먹이 흔들거렸다. 각오를 한 듯 고개를 살짝 치켜 들 때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에비나가 말문을 열었다. 쐐기를 박으려는 듯이.

 

히키가야. 나랑 같이, 행복해지자.”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여기까지 이해하고 나서, 희망을 얘기해 준 사람이 없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 있다.

 

목이 메일 것만 같아서 그걸 제대로 된 언어로 바꿀 수가 없었다.

 

나는 믿고 있던 게 아닐까.

 

내가 외톨이로서 살아가겠다고, 모든 인간관계를 쳐내고, 내 모든 행위의 결과를 부정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 그 모든 장벽을 뚫고 나타날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고.

 

그렇다면 아무리 의심 많은 나라도 그 사람의 마음을 부정할 도리가 없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관계일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던 게 아닐까.

 

……에비나.”

?”

 

나는 시선을 들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에비나를 바라보았다. 황혼의 빛을 받은 소녀는 타오르는 듯한 빛을 품은 채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속마음을 그대로 토해냈다.

 

예쁘구나.”

 

내 말에 에비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왼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에비나는 신경질적으로 오른쪽 손가락을 들어 나를 찌르려 들었다.

 

대답은 안 하고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거짓말 아닌데.”

그럼 히키가야 눈이 이상한가봐.”

 

에비나는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안경을 벗더니, 사뿐하게 안경을 반 바퀴 회전시킨 후에 나에게 씌웠다. 그런 내 모습을 잠시 꼼꼼하게 뜯어보던 에비나는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그러니까 벌칙으로 교정치료. 잘 어울려.”

……. 너 시력 몇이야? 머리가 어지럽다고.”

 

도수가 높은 렌즈 속 세상이 이지러졌다. 경계선상을 따라서 굴절된 풍경은 어딘가 인쇄가 잘못된 만화책을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에비나는 그 속에서 나를 향해 팔을 뻗었다.

 

흘러내리는 붉은색 테두리 속.

 

처음으로, 에비나가 진짜 웃는 모습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과연 하야마라고 해야 할지, F반에서는 몇 명의 커플이 성공적으로 탄생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끄러웠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첫 실패자였던 토베도, 그리고 그 전에 있었던 나에 대한 화제도 훨씬 줄어들었다. 이쯤 되면 하야마를 연애 조언의 신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의 성공률이 아닐까. 앞으론 하야마를 함락신이라고 불러야겠다. 마주칠 일이 없지만.

 

하치만.”

 

여튼 그렇게 나의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은 끝났다. 그리고 긴 겨울방학 내내 조심스레 살아온 나는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간신히 깁스를 풀 수 있었다. 아직 오른 다리에 가끔씩 힘이 풀릴 때가 있지만 차차 좋아지겠지.

 

하치만.”

 

3학년으로 진급하고, 새로 배정받은 교실 구석 자리에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봄이라고 말하기엔 힘든, 쌀쌀한 기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날씨였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날씨가 풀리고, 저 안뜰 안은 온갖 리얼충들이 난립하는 천하무도의 장이 되겠지. .

 

하치만!”

?”

 

옆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가 들려서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토츠카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3학년에 올라오고 나서 그대로 같은 반이 된 건 토츠카 뿐이었다. 다른 애들과는 모두 반이 갈렸고, 그와 동시에 안 그래도 적던 대화의 빈도는 그대로 급감했다. 그나마 계속 얼굴을 비추고 있는 봉사부를 빼면 남는 게 없을 정도. 하지만 언제까지 부활동을 계속하고 있을 수도 없겠지. 대학 진학을 생각한다면 슬슬 입시에 매진해야 할 시기이기도 하니까.

 

정말, 하치만. 몇 번이나 불렀단 말이야.”

,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뭐 때문에 불렀어?”

 

토츠카의 책망에 나는 최대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토츠카는 이내 표정을 풀고선 배시시 웃었다. 우왓, 위험하다고. 완전 귀엽잖아.

 

아까 쉬는 시간에 에비나 양이 찾고 있던 거 같던데? 교실 안 슥 둘러보더니 갔어.”

아아……. 그런가. 알았어. 땡큐, 토츠카.”

 

내 상황이 그러니만큼 가끔씩 우리 반에 찾아오는 에비나 히나의 존재는 나를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선 신기할 수밖에 없겠지. 아직 남들 앞에서는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딱히 사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지만. 아니, 그건 내가 쌓아온 이미지 때문인가? 그러고 보니 집에서 넌지시 운을 떼어 봤지만 코마치조차 믿지 않았다. 그리고선 울상을 지으며 머리가 아플 땐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뭐냐고, 대체.

 

고개를 흔들어 나쁜 기억을 떨치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좀 여유가 있었다. 잠깐 다녀와 볼까.

 

그럼, 잠깐 실례.”

. 잘 다녀와, 하치만!”

 

손을 흔드는 토츠카를 뒤로 하고 나는 교실을 나섰다. 에비나는 나를 만나러 올 때 핸드폰으로 연락을 한다던가, 반 애들에게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남긴다던가 하는 일이 없었다. 슬며시 찾아와 내가 있는 걸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면 눈짓으로 날 불러낼 뿐.

 

그건 아마도 나를 위한 배려겠지.

 

작년의 그 날 에비나의 전력을 다한 고백 아닌 고백에 나는 아직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나도 에비나도 서로의 성격을 잘 아니까, 에비나가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확신에 가깝게 추정하고 있다.

 

길지 않은 복도를 걸어갔다. 에비나가 있는 교실은 우리 반에서 세 칸이 떨어져 있다. 아직 근육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건지, 저릿거리는 오른 다리에 힘을 주며 산만한 군중 속을 헤쳐 나갔다.

 

교실 앞에 다다랐다. 일단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에비나의 모습을 확인하기로 했다. 용건이 있는 사람도 없는데 가볍게 남의 반에 발을 들이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교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 학교에서 얼마 안 되는, 나와 대화를 나누던 여자애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창가 쪽, 에비나가 몇몇 여자애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에비나는 조용히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의 대화에 그다지 끼어들지 않고, 나서지도 않고. 그리고 애들이 뭔가를 물어볼 때마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치는 모양이었다.

 

물론 미우라 유미코가 없는 한 에비나의 위치는 반 내에서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 본인이 가끔씩 꺼내놓곤 하는 과거 얘기의 편린을 주워 모아 봐도 적극적으로 관계 형성에 나서는 타입은 절대 아니었고.

 

무슨 얘기를 하나 싶어서 벽에 등을 기댄 채 귀를 기울였다. 최대한 집중해서 에비나의 목소리를 잡아내려 했다.

 

히나는 애인 있어?”

, ……, 아직은 좀 미묘하다고나 할까.”

에이, 또 그런다. 이번에 단체로 미팅 나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

아니, 좋아하는 사람 있거든.”

말로만 그러지 말고~. 그러면 누군지 알려주기만 하면 포기할 테니까.”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거였나.

 

하아.

 

결국 이건 작년에 있었던 토베와 에비나의 고백극에서 잔존한 앙금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드러내고 퇴장한 토베와는 다르게, 에비나는 그 때 새로운 궁금증을 하나 남겨 놓았으니까. 그리고 아직까지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만 반복할 뿐, 그게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이유를 지금 내가 짐작 못할 리가 있나.

 

나는 벽에서 등을 뗐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에비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따위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나나 에비나나 그 방면에 있어서는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서,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에비나를 불렀다.

 

 

어이, 에비나.”

 

어라, 히키가야?”

 

 

에비나가 당황해 하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에비나 주위에 있던 애들이 나를 보고 누구냐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마음껏 궁금해 하라지.

관객은 관객의 역할에나 충실하고 있으면 좋다.

 

 

"잠깐 얼굴 좀 보러 왔는데."

"헤에, 굉장히 의외네. 히키가야 쪽이 먼저 찾아오다니."

할 말이 있었거든.”

무슨 할 말이길래?”

생각해 보니 이름을 불렀던 적이 없더라고.”

이름?”

 

그 동안은 좋은 핑계가 있었다. 다리가 아직 낫지 않았으니까.

바깥에 별로 나간 적도 없었고, 방학이라는 특수한 시기가 겹쳐지자 에비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랬으니까 나는 마음을 놓은 채 에비나의 호의에 기대서 대답을 미뤄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된다.

 

누군가의 호의에 안주해 넋을 놓고 있는 건 어쨌거나 내 방식이 아니니까.

 

 

 

앞으로 남은 거리는 오로지 한 걸음.

 

언제나 망설여 왔던 최후의 77센티미터.

 

 

 

나는 움직였다.

 

남아 있던 마지막 한 걸음을 좁히며,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히나.”

 

 

이 마지막 77센티미터를 좁히는 데 걸렸던 시간, 3개월.

 

히키가야 하치만이 전진하는 속도, 시속 0.035 센티미터.

 

이 정도면 백만 나무늘보 군단을 상대해도 이길 것 같다.

그게 조금은 희망이 된다.

그렇게 살고도 아직 멸종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어쨌든 턱없이 느리지만 제로는 아니다.

 

나를 닮았다면 분명 그녀 역시 마찬가지겠지.

 

조금씩이지만, 무언가가 나아지긴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네가 좋아하던 HxH 아니냐?”

으으…….”

 

 

에비나는 머리를 싸매 쥐고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표정이 차라리 더 부담이 없지.

 

그러니까, 아직은 웃지 못해도 괜찮아.

 

혼자가 아니니까.

 

 

알았어, 하치만.”

 

 

왠지 뾰로통하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나는 슬쩍 웃으며, 손을 뻗어 에비나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에비나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은 채, 툴툴거리며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찔렀다.

 

나에게 있어 사람의 관계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외톨이였으니까, 인간 관계에 있어 능숙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는 순간 예측하지 못했던 엇갈림과 불화가 튀어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워서 한 번도 그 바닥을 보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외톨이라서, 사랑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까.

 

정말로 이걸로 될까, 이 관계는 파국을 맞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으로 나아가는 걸 방해하고 있었다.

어차피 깨져버릴 관계라면 의미는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었다.

 

그걸로 좋았던 것이다.

 

충분했던 것이다.

 

그 순간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기억과 추억이,

 

되돌아보면 가슴 속에 조그마한 힘이 되어 남아 있었다.

 

그렇게 텅 빈 것 같던 마음이 채워져 간다.

 

달팽이보다 느린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닮은, 잘 웃지 못하는 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까지 열린 상자 속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던 감정이 마침내 빛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야 그 시작을 알게 된 감정에 이름을 붙여 잊지 못할 기억에 품었다.

 

 

 

 

그 모든 것이 있던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

 

외톨이라서, 나는 사랑을 했다.

 

 

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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