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_05

하야마 하야토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할 것이 없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말하고 싶은 게 없다는 쪽이겠지. 내가 하야마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섞인 복잡한 것이며, 나 자신조차도 정확하게 해석할 수가 없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떠들라고 해 봐야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겠지.

 

내가 하야마라는 인간에 대해 우월감을 품었다는 사실이 신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야마는 그 누구도 상처 입는 걸 원하지 않는 겁쟁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의 사슬은 반드시 선택을 강요하게 된다. AB, 명확하게 구분되는 이분법적인 선택지. AB 모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선택하면 나머지는 반드시 상처를 입는다.

 

하야마는 그렇게 할 수 없겠지. 그리고 하야마는 요 1년간 그 선택의 순간을 몇 번이나 맞이해 왔다. 매번 주저하고 매번 고민하며 매번 움직이지 못했다.

 

거침없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누구에게도 미련이 없는 사람뿐이다. 바로 나 같은 사람. 그렇기 때문에 나는 행동해 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하야마 앞에서 보란듯이.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건 하야마에게 있어 씻기 힘든 자존심의 상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딱히 미안하다거나 앞으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내 잘못? 쓸데없는 고생을 자처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가 나를 질투한다 하더라도 그게 사과해야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세계는 나에게 사과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도 하지 않는다. 간단한 논리.

 

결국은 그거다. 나와 하야마는 서로가 서로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혐오하고 있다는 것. 한 쪽이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일도 없을 거고,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다른 한 쪽이 그걸 흔쾌히 받아들일 일도 없다.

 

다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할 줄은 안다.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는 이 머나먼 거리감을 유지한 채로 살아가겠지. 얼굴을 봐도 아는 체는 하지 않고, 서로 스쳐지나가더라도 섞이지 않고. 자석의 N극과 N극 같은 데면데면함이 필요한 관계.

 

에비나 히나가 자주 하던 말버릇이 떠올랐다. 그 표기 자체는 틀리지 않다. 다만 그 뜻만은 에비나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서도.

 

하야토X하치만.

 

그 가운데 들어간 X는 분명, 부정을 의미하는 X가 될 테니까.

 

 

 

역시 내 청춘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에비나 히나는 웃지 않는다

5

 

 

 

유키노시타나 유이가하마가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기색이 보였기에 오늘은 간만에 봉사부 활동에 얼굴을 내밀어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다친 건 내 잘못이지 다른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적어도 그 부분만은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두고 싶었다.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도록. 두 번 다시 착각하지 않도록.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봉사부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후회의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지금 당장 과거를 향해 D 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봉사부는_SERN_함정.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망하겠지, 이거.”

힛키! 성의가 없다구!”

 

유이가하마가 볼을 부풀리며 나를 타박했다. 아니,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칠판에 적힌 이번 아이디어, 히키가야 하치만의 스쿨 아이돌 계획을 바라보았다. 러브도 라이브도 없는 기획이라면 망하는 게 당연하겠지.

 

그리고 나는 내 흑역사 목록에 두터운 볼드체로 한 줄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썩은 표정으로 이 아이디어를 발안한 소녀, 에비나 히나를 돌아보았다. 에비나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부렸다.

 

브레인스토밍 결과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도록 하렴, 히키가야.”

아니, 이런 일에 무슨 브레인스토밍까지…….”

일반적인 방법론으로는 해결이 힘들어 보이니까. 다양한 방법들을 검토해 보려 했을 뿐이야.”

 

유키노시타는 한숨을 내쉬며 지우개를 들어 그 황당한 기획을 지웠다. , 그런 측면이라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실제로 미우라는 이미 이 일에 흥미를 잃은 건지 구석에서 핸드폰을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는 일에 계속해서 매진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처음 결심했던 때의 뜨거운 결심도 이내 식어버리고, 지루한 반복의 늪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리고 결국 포기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이 의뢰가 계속되고 있는 건 아마도 유키노시타 때문일 것이다. 유키노시타는 자신이 힘들다고 하더라도 맡은 의뢰는 절대로 도중에 그만두지 않겠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는 한에는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유키노시타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다른 사람을 살피려 하는 유이가하마 역시 포기하지 않는다.

 

그 자세는 분명 미덕이겠지만……실패로 끝날 도전에 의미가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 후회는 없다? , 웃기는 소리다. 후회가 없다면 말을 꺼낼 필요조차 없다. 저 어설픈 자기위로의 말은 결국 자신이 실패에 상처입고 좌절하고 쓰러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구절일 뿐. 말 자체가 담고 있는 것은 희망과 긍정일 텐데도 그 속에는 절망과 좌절이 깊게 배어 들어가 있다. 슬플 따름이다.

 

유키노시타는 당당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 볼 예정이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요청도 할 거고."

"도움을 받다니?"


문맥상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왔기에 무심코 되묻고 말았다. 아차, 활동정지라고 했는데. 하지만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유키노시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가볍게 대꾸했다.


"F반 내에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에게 조력을 요청한다는 뜻이야. 도움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제는 알겠니, 히키가야?"

", 내 국어 성적은 전교에서 3등이거든? 내가 놀란 건 우리 반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겠다는 대범한 발상 부분이라고."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사이하구는 친하지 않아?”

 

옆에서 듣고 있던 유이가하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의견을 반박했다.

 

"뭔 소리야. 사람을 찾는다고 했잖아. 토츠카는 천사니까 사람이 아닌 게 당연하겠지!"


내 논리에 천하의 유키노시타마저 할 말을 잃었다. 다들 우와아……하며 질렸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진리란 언제나 핍박받는 법. 나는 굴하지 않고 시선만 돌리기로 했다.


"저건 정말 구제불능이네."


미우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거라니. 내 학창 시절 비참했던 별명 제 2위가 화려하게 부활해 버리고 말았다. 마왕인가. 아무리 쓰러뜨려도 다시 되살아나는 걸 보면. 근데 잘 생각해보니 쓰러뜨린 적이 없잖아. 마왕이라기보단 에어맨이로군.

 

여튼 그쪽도 염두에 두고 있도록 하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더 이상 상대도 하지 않겠다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 활동 정지 명령까지 받았는데 내가 나설 순 없지.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결만 하고자 한다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을 알고 있긴 하다.

 

다른 희생양을 만드는 것. 그래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리면 된다.

 

내 상황은 2학년 초기와는 좀 다르다. F반에 그래도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다. 신중하게 대상을 선택하고, 중간 단계까지 의심하지 않을만한 소문을 하나 준비한 후 그들을 경유해서 퍼트려 매장시켜버리면 된다. 다른 더 만만한 먹잇감이 나타난다면 다들 나에게서 신경을 끊겠지.

 

한 일주일쯤 느긋하게 관찰한다면 한 인간을 내 위치까지 끌어내릴 만한 소문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겠지. 어차피 학생들의 심판이란 것은 즉흥적이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죽을 바에는 죽여라.

 

속을 바에는 속여라.

 

그게 분명 인간 개인에게는 유효한 방향성이겠지. 생존에 유리한. 츠루미 루미 때만 봐도 그건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모이면? 인류는 파멸하고, 세계에는 오롯한 단 한 사람만이 남게 될 뿐이다. 생존에 유리한 방식들이 모여서 결과적으로 반대로 작용한다. 아이러니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 때 유이가하마의 핸드폰이 울리며 메일의 도착을 알렸다. 화면을 열어 메일을 확인한 유이가하마는 나를 보며 말했다.

 

힛키, 토벳치한테 메일 왔어.”

 

그런 건 굳이 나한테 말해줄 필요 없잖아. 내 표정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인지 유이가하마는 울컥한 어조로 내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축구부 연습 끝나서 곧 가니까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데? 나 말구 힛.. 말이야.”

? ?”

, 힛키한테 전해달라고 했어. 힛키 연락처가 없으니까 나한테 메일이 오는 거잖아.”

 

유이가하마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뒤집어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거기에는 나에게 할 말이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간단한 내용의 말이 길게 써져 있었다. 이 정도로 분량을 부풀리는 재주가 있다니, 등가교환의 법칙을 넘어선 거 아니냐고. 팔이나 다리를 대가로 내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뭐 잠깐 기다릴까. 나는 나가려 하는 유키노시타를 불렀다.

 

유키노시타. 부실 열쇠 있으면 주라. 내가 반납할 테니까.”

……그런 다리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겠니?”

 

유키노시타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미우라를 쳐다보았다. 미우라는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하아? 축구부 연습 끝났다고 했잖아? 우리들은 하야토 만나러 갈 거거든? 너한테도 말했잖아?”

그게 오늘이었니? 그럼 어쩔 수 없구나.”

 

듣자하니 미우라 그룹은 이미 하야마와 만날 약속이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유키노시타도 그걸 이미 알고 있었고. 흐음. 의외라고나 할까. 미우라가 그런 걸 세세하게 유키노시타에게 보고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어쨌든 쓸데없는 일로 이 둘이 다투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이들은 말하자면 태풍……움직였을 때의 여파가 너무 크다. 그리고 그 여파가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어디로 쏠릴 것 같은가? 나는 나의 안전을 위해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그런 티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말했다.

 

어차피 토베가 온다니까, 걔한테 부탁하면 되겠지.”

 

어차피 이 다리로 다른 데 서서 기다리기도 뭐하고, 그냥 부실에서 기다리는 게 낫다. 그리고 토베를 만난 후에 열쇠 같은 건 토베한테 떠넘기면 된다. 완벽한 작전이다.

 

유키노시타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이것은 유키노시타의 인스퍼레이션이 발동되었다는 의미다! 뭐에 발동이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나가는 곰이 있다면 주의해야 하겠지. 나는 곰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유키노시타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그럼 토베랑 얘기 잘 나누도록 하렴.”

“TXH……이건 또 신선……!”

 

깨진 텍스트 파일 같은 그 글자는 대체 뭐냐고. 부훗거리는 에비나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유키노시타가 내민 부실의 열쇠를 받아들었다. 직원실에 반납하면 되는 건가.

 

그럼 히키가야. 다음에 부활동 때 보자.”

우린 교실에서 보겠네! 힛키, 내일 봐!”

 

유키노시타와 유이가하마가 나에게 인사를 건넨 후 나란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미우라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이 빠르기, 닌자인가……. 분명 장애물이 나타나면 양 옆에 장비된 황금의 드릴로 길을 뚫겠지.

 

에비나는 가장 뒤에 있었다. 아마도 평소 그녀가 유지하던 포지션이겠지. 일행의 반 발자국 뒤에서 모두를 살피며 해야 할 행동을 가늠하는 것. 나가기 전, 나에게 인사를 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 갑자기 그녀의 가방끈이 풀렸다. 에비나는 깜짝 놀라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상태였다. 책이 담긴 가방이 바닥에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냈다.

 

아앗! 안되는데!”

히나! 뭔 일 있어?”

 

복도에서 유이가하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비나는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주우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방끈이 풀려서! 금방 갈게!”

! 천천히 가구 있을게!”

 

고대 그리스 시절의 전쟁터에서 쓰이던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던 여자(성명 : 에비나 히나, 직업 : 현대인)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풀려버린 가방끈을 다시 잇고 있었다. 자그마한 구멍을 집중해서 노려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에비나의 머리 뒤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에비나를 불렀다.

 

에비나.”

?”

, 머리에 뭐 붙어있는데.”

 

패딩 점퍼에서 빠져나온 깃털인가? 그럴 계절이긴 하지. 여튼 새하얀 뭔가가 머리카락 안쪽에서 삐죽하니 튀어나와 있다. 에비나는 몇 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뭐가 묻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런다고 보이겠냐.

 

에비나는 그 무언가가가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행동은 꽤나 이상한 것이었다. 에비나는 가방을 그대로 든 채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내 다리 앞에서 몸을 돌리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로 나에게 내밀었다. 부드러운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리고선 태연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히키가야. 좀 떼 줘.”

?”

뒤에 붙어있는 거 아니야? 안 보이니까 떼 달라고.”

 

내가 아무런 대답 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에비나는 볼을 부풀리며 나를 비난했다.

 

어라, 혹시 거짓말? 히키가야, 얄궂다고.”

, 그냥 네 손으로 떼면 되잖아. 너 손 없냐?”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에비나의 되도 않는 말에 반박했다. 나는 스킨십이 싫다고. 가급적이면 누구와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에비나는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내 주장을 간단하게 무시했다.

 

, 무리무리.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많단 말이야.”

 

어깨 너머로 살펴보니 뭔가 들고 있긴 했다. 가방이라거나, 책이라거나. 하지만 옆에 책상도 있으니 그냥 내려놓고 오면 됐잖아. 왜 풀어진 가방끈 채로 붙잡고 여기로 온 거냐고. 나는 어디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비나는 꿈쩍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금방 가겠다고 유이가하마한테 말하지 않았냐. 이래도 되는 건가요, 에비나 양.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에비나는 지루하지도 않은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더욱 초조해졌다.

 

토베가 곧 여기로 올 건데, 내 다리 사이에 쪼그려 앉은 채 뒤통수를 맡기고 있는 에비나의 모습을 본다고 생각해 보라. 어쨌든 뭔가 이상한 그림이다. 너무 가깝다는 점도 치명적인 요인이다. 질투로 이성을 잃은 토베가 나를 살해할지도 모른다.

 

, 실제로 살해당할 일은 없겠지만 쓸데없는 오해와 근거 없는 억측을 엄청나게 떨이로 싸게 되겠지. 이미 많으니까 필요 없습니다. 나는 코마치를 달래는 기분으로 항복 선언을 했다.

 

……그래. 내가 떼 준다.”

아하하, 진작 그랬으면 좋잖아. 그럼 상냥하고 부드럽게 부탁드립니다!”

 

이어지는 에비나의 말을 무시한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찰랑거리는 까만 머리카락의 감촉이 차가웠다. 그 감촉이 옛날의 경험을 상기시켰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아 있을 때, 상대방의 눈에 어리던 경멸과 혐오의 기색을. 어렸을 때부터 쌓여온 그 눈길이 스킨십에 강력한 거부감을 지니게 만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그냥 단지 깃털을 빼낼 뿐이다. 살갗은 닿지 않는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다짐한 후 최단 거리로 손을 움직여 단숨에 깃털을 빼냈다. 결과는 가볍게 성공. 헤이세이의 톰소여라도 한 수 접어줄 만한 훌륭한 실력이었다. 손에 남아 있던 머리카락의 감촉은 금세 사라졌다.

 

뺐다.”

 

빼낸 깃털을 어깨 너머로 건넸다. 에비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면서 두 손으로 그 깃털을 꼬옥 받아들었다.

 

히키가야, 땡큐.”

 

에비나의 표정에서 불쾌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반대로 조금 상기된 기색과 아쉬움이 느껴진다. 설마, 내 착각이겠지. 이래서 남자들이란! 남편 흉을 보는 주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의 전업 주부 레벨이 또 한층 메가 진화하고 말았군…….

 

에비나는 잠시 깃털을 들고 고민하는가 싶더니, 바로 손바닥 위에 깃털을 올리고 훅 하고 입깁을 불었다. 하얀 깃털이 바람에 날려 하늘거렸다.

 

히키가야는 아까 보니 잘 모르던 것 같은데.”

뭐를?”

의외로 너를 도와주고 싶어하는 사람, 많지 않을까? 스쿨 아이돌 가능!”

글쎄다. 아무리 봐도 그건 무리겠지.”

안 믿네. 진짠데.”

 

에비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마치 어린 아이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다. 모두가 아는 것을 나만 모른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시선. 하지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소녀가 자신을 대 유기 생명체용 휴머노이드 인터페이스라고 소개한다고 해서 누가 믿겠냐고. 이번 일은 그런 SF급의 비일상과 맞먹을 정도의 명제다.

 

아하하. 그러니까, 아마 절대로 괜찮을 거야.”

 

모 카드캡터의 말버릇을 중얼거리며, 에비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 가방을 잡아당겨서 끈이 풀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에비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그럼 히키가야. 내일 보자.”

그래, 내일 보자.”

 

이미 나에게서 등을 돌린 에비나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며, 나는 부실 안에 앉아 멀어져 가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에비나까지 떠나고 몇 분 쯤 지났을 무렵, 부실로 찾아온 토베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진지한 표정으로 배가 출출하니 라면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거절할까 했지만 위치가 바로 학교 근처였던 데다가 토베가 겸사겸사 해야 할 말이 있다고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기 때문에 포기했다.

 

열쇠를 직원실에 반납하고, 조금 걸어 학교에서 바로 한 블럭 떨어져 있는 라면 가게로 향했다. 진한 육수의 향기가 멀리서부터 풍겨왔다. , 나쁘지 않네. 부활동까지 끝난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에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와 토베는 바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히키타니. 뭐 먹을래? 내가 한 턱 낼게.”

 

토베는 가게의 자판기 앞에 서서 나에게 물었다.

 

아니, 나도 돈 있으니까. 각자 내자고. 얻어먹을 이유도 없잖아?”

에이, 섭섭하게 왜 그래. 몸을 날려 에비나를 구해준 게 누군데!”

 

아니, 에비나가 너랑 무슨 관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걸로 감사한다고 해 봤자 그저 혼자서 난리치는 행동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자판기에 집어넣었다. 일단 넣으면 쓸데없는 말을 계속하지는 못하겠지. 옆에서 토베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시했다.

 

. 뭐가 좋을까. 종류는 꽤나 많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처음 오는 가게라면 능히 가장 기본이 되는 라면을 먹는 것이 나의 폴리시다.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코트를 제압하는 법……기본이야말로 그 가게의 맛의 근본인 것이다! 나는 거침없이 맨 위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밑의 배출구에서 식권이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목발을 둘만한, 적당히 넓은 곳에 자리를 잡고 식권을 주방에 내밀었다. 언뜻 보이는 주방을 슬쩍 살펴보았다. 개점한 지 얼마 안 되는 가게라 그런지 깔끔함이 감돌고 있다. 일단 위생 같은 부분에서 걱정이 될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동안은 나의 프론티어 스피릿이 닿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다. 학교 바로 옆이라니, 얼굴은 알지만 인사는 나누지 않는 어색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이런 놈들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더욱 거북하다. 그러다보니 이쪽으론 거의 올 일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 생각보다 맛있다고.”

 

생각보다는 뭐야. 토베는 몇 번 와본 모양인지 제법 익숙한 손길로 젓가락이나 생강 초절임 같은 걸 테이블 위로 늘어놓았다.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티슈와 물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서로의 어색함을 풀어놓기 위한 행위다. 일부러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느린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다.

 

동생도 아니고, 같은 반 남자 놈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왔을 땐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다른 사람이라면 당연히 저 쪽도 나에게 할 말이 없겠거니 하면서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토베는 아까 전부터 히키타니 나의 말을 들어줘!’ 오라를 내뿜고 있어서 지극히 곤란한 것이다.

 

히키타니. 내 말을 들어줘.”

, 깜짝이야.”

?”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아무 말이나 해봐.”

 

나는 티슈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고 말했다. 순간 토베가 남의 마음을 읽어내는 사이코메트러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내가 토베의 행동을 읽어낸 거였다. 그런가, 내가 사이코메트러였나…….

 

나 솔직히, 에비나 쫌 많이 좋아하거든.”

그래. 그건 이미 알고 있어.”

그래서 안단 말이야. 네가 구해준 날 이후로, 에비나 멍때리면서 너 보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고.”

?”

 

나는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반문했다. 에비나가 나를? 뭔 헛소리야? 내 놀라는 모습을 보며 토베는 씨익 웃었다.

 

나도 눈치라는 게 있다고.”

 

그 눈치는 에비나에 관한 눈치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토베의 두뇌는 에비나 점유율이 100% 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토베는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을 찌르고 들어왔다.

 

히키타니, 너 에비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그 때의 고백도 가짜고?”

 

나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아까의 놀람과는 다르다. 내가 살짝 무시하고 있었던 토베에게 내 속을 일부나마 간파당한 것에 대한 경악, 그리고 그런 것에 경악을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섞인 놀람이었다.

 

내가 뭐가 잘났다고 토베라는 인간을 가늠한단 말인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그런 억측은 해서는 안 된다. 그건 결국 자기 자신을 남에게 덧씌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나는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래. 고백은 가짜였어.”

 

감정을 정리하고, 순순히 수긍했다. 어차피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에비나의 결심을 토베가 들었다는 것이다. 그거면 이미 의뢰는 달성, 그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어떻게 알았지? 티는 안 냈다고……아니, 그 전에 F반에서 고립된 나에게서 그런 기미를 발견하는 건 어려울 텐데?”

지금 방금 알았을 뿐이라고~. 그 전까지는 그냥 히키타니 따위가 나의 에비나에게! 하는 느낌?”

 

손에 쥔 젓가락을 짤깍거리며 토베는 웃었다.

 

잘은 모르지만 말이야. 누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상태라면, 같은 반에서 그 애가 자신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고. 나는 다 보이니까 말이야. 에비나가 누굴 보고 있는지. 히키타니는 전혀 안 그랬잖어?”

 

그런 거였나.

 

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문외한인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 싹을 잘라내는 법을 익혔을 뿐이다. 어차피 그 끝이 좋을 리 없으므로. 그런 면에서 볼 때 토베의 말을 부정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나는 타인에 관한 관심과 호의를 오랫동안 간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쪽 방면에서의 경험은 토베가 나보다 월등하겠지. 여러 의미로 얄팍한 이 남자는, 청춘이 상징하는 고민과 고통도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았을 테니까.

 

토베는 콧등을 문지르며 쑥쓰러움이 담긴 어조로 나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다. 나 쪽팔리지 않게 해 준 거지?”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제스쳐도 하지 않았다. 토베는 나의 묵언을 긍정으로 생각한 것인지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 정말 도움이 됐다고~. 에비나, 단호했으니까 말이지. 뒤에 서 있는데 섬찟하고 소름이 돋더라니까.”

 

어깨를 감싸며 몸을 떠는 토베의 말에 그 날, 대나무 숲에 있던 에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 속에서 오로지 두 사람만이 각오를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다른 관계가 어색해질 각오를 하고 고백을 준비하던 토베 카케루. 그리고 어색해질 관계라면 모두 내쳐버릴 각오를 하고 고백을 대비하던 에비나 히나.

 

하얗게 피어오르던 등롱의 빛, 위에서 내리쬐는 부드러운 달빛, 두 빛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던 흔들리는 대나무의 그림자……. 파란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있던 그 길을 걸으며 에비나가 했을 사고를 추적하기란 내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걸음을 걸으며 토베 카케루를 버리고, 가는 걸음걸음마다 차례대로 미우라 유미코를, 하야마 하야토를, 유이가하마 유이를 기억과 애정 속에서 몰아냈을 에비나의 결심은 분명 단호한 것이겠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막았다.

 

그 단호함을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 그들 중,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토베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도 말이야. 나 진짜 에비나 좋아하거든.”

 

옛날, 케이블 TV에서 봤던 어떤 드라마가 생각이 났다.

 

세상 사람들에게 묻나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하는가?

 

나도 묻고 싶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강력한 모티베이션. 사랑이라는 감정의 근원에 대하여. 내가 겪었던 것들은 무언가 긍정적인 요소라고는 단 한 개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순간 설레고, 순간 가슴이 뛸지라도 바로 감정을 죽여 버릴 수 있다.

 

역시 결론은 직접 확인해야 되지 않겠냐. 그래야 성이 풀릴 거 같아.”

그러냐.”

 

하지만 토베는 다르다. 이 인간은 어찌해서 거절당할 길을 나아가려 한단 말인가. 혼돈과 모순으로 가득 찬 이해불가의 자기긍정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이미 그 재앙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름하여 청춘.

 

토베의 결정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미 나는 토베의 의지를 한 번 진흙탕에 처박은 적이 있다. 그걸 알고도 나를 원망하지 않는 녀석을 다시 부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과거의 경험과는 다른,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거리를 재는 것을 방해한다.

 

이럴 땐 무슨 표정을 지으면 될지 모르겠다. 적어도 웃는 걸로 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웃지 않았다.

 

고마웠다, 히키타니.”

 

토베는 젓가락을 들어 테이블을 두드려 길이를 맞췄다. 나무가 나무를 때리는 그 소리는 어딘가 법정에서 내려쳐지는 망치의 소리를 연상케 했다.

 

그 이야기는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 토베는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돌렸다.

 

여기 라면, 맛있다고. 기대해도 좋다고~.”

 

그렇게 말하고서는, 토베는 웃지 않는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운명의 시간이 오고야 말았다. 바로 토베가 재차 에비나에게 고백을 하려고 시도할 결전의 날. 나는 살짝 어수선한 분위기의 우리 반 교실을 바라보았다.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 애들에게 토베가 잠시만 시간을 내 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무언가 몸을 단장하는가 싶더니, 사물함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에 들었다.

 

최대한 단정하게 입은 교복,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몸,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잘 포장된 한 송이 붉은 장미. 저건 대체 언제 나가서 사온 거지? 아니면 학교에 올 때 사서 들고 온 건가. 어느 쪽이 되었건 간에 토베가 신경을 썼던 시간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속이 쓰렸다.

 

그 때 나의 고백으로 인해서 토베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에비나가 자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그래서 모두가 행복해졌다. 그랬을 텐데, 대체 왜 이 상황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거지?

 

라면집에서의 토베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한 번도 토베와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웅성거리는 F반 애들을 타넘고, 토베 카케루는 에비나 히나 앞에 섰다. 에비나는 미약한 미소를 띤 채 토베의 말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제야 다른 애들도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벌어지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서는 그 둘을 바라보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소근거림으로 바뀌었다.

 

에비나 히나 님.”

 

멋을 잔뜩 부린 쓸데없이 근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무 오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토베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주위로 웃음이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토베는 등을 곧게 폈다. 눈을 들어 똑바로 에비나를 응시하고 있다.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것이 자세로부터 똑똑히 느껴졌다.

 

, 토베 카케루는!”

 

모두의 시선을 모으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토베가 큰 소리로 외쳤다.

 

오래 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부디 저와 사귀어 주십쇼!”

 

축구부다운 폐활량이라고 해야 하나, 복도가 떠나가라 쩌렁쩌렁하게 울린 그 고백은 F반이라는 교실을 넘어 전교생의 관심을 끌었다. 복도 쪽에 달린 창문 너머로 애들이 계속해서 우리 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기웃거렸다. 주위로 토베와 에비나의 이름이 물결치듯 퍼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고백은 잘 짜인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부터 봉사부가 고민하고 있었던 문제. 어떻게 해서 F반의 분위기를 개선할 것인가? 그 문제에 대한 대답. 내가 애들의 비난과 경멸을 모으는 존재라면, 나의 존재감을 다시 지우면 된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 나는 다른 희생양을 만든다는 생각 이외에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나보다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지금 와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결국 나를 비난하고 경멸했던 놈들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패배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토베는…….

 

패배를 각오하고 있는 토베의 앞에서 에비나가 짧게 심호흡을 했다. 거절의 칼을 꺼내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이 반에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예감하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겠지. 그 날, 수학여행의 기억을 공유하는 자들만이 알 수 있는 뻔하디 뻔한 결과. 돌아올 것은 그 누구와도 사귈 생각이 없다는 차가운 엔딩뿐이다.

 

그러나 토베는 망설이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떨리는 주먹으로 한 송이 붉은 꽃을 쥐고, 흩어지려 하는 마음을 타이로 단단히 동여맨 채로.

 

나는 순간,

 

그 모습을 장엄하다고 생각해 버렸다.

 

아름답다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대중의 폭력에 가까운 관심을 받게 될 걸 알면서도, 이 고백의 끝이 거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것들이 무서워서 몸을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지 않는 토베를 보면서.

 

나는 흔한 이성애자다. 토베는 징그럽고 얄팍한 남자였다. 적어도 외면적인 부분에서 내가 토베를 아름답다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물리적으로 전혀 아름다울 이유가 없는 풍경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엔 분명 다른 원인이 있는 법이겠지.

 

그건 아마도 인간의 자세가, 태도가, 언행이, 행동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빚어낸 한 인간의 마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증거가 되리라.

 

그 아름다움이, 내가 부정해왔던 청춘의 긍정이 날카롭게 내 마음을 찔렀다. 저기에 서 있는 것이 토츠카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논리와 자아가 이토록 위협받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 전개의 끝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곧장 에비나의 칼이 뽑혔다.

 

미안.”

 

토베의 표정이 순간 살짝 꿈틀거렸다.

 

제아무리 예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거절당한 것이 상처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라도 미약한 기대를 품게 되지 않을까.

 

토베는 버텨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이어질 에비나의 말을 기다렸다. 차가운 칼날이 휘둘러지고, 토베가 거기에 베여 쓰러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비나는 허리를 곧게 폈다. 어깨에 닿는 세미롱의 까맣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찰랑거리고, 그 사이로 빨간 안경다리가 걸쳐져 있는 자그마한 귀가 언뜻언뜻 드러났다. 안경 렌즈 너머에 있는 눈이 타오를 것처럼 빛났다.

 

단호하게,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수학여행 때와는 달라진 거절의 말. 그 말은 곧장 도화선이 되어 새로운 화제를 군중 안에 던져 넣었다. 에비나 히나가 누구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건 좋은 가십거리겠지. 그녀가 지금껏 쌓아온 부녀자라는 캐릭터를 단숨에 뒤집는 놀라운 반전일 테니까. 나는 멀리서 그 말의 진위 여부를 가늠해 보려 했다. 당연히 알 수 없었다. 거절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토베는 분명,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계속 친구로 지내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거절의 말을 끝맺으며, 에비나는 살짝 웃었다. 토베 역시 과장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쾌활하게 웃었다.

 

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어쩔 수 없나! 하지만 앞으로도 부디 지금처럼 잘 지내자고!”

 

꾸며낸 것 같은 그 대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인간관계는 파괴된다. 그것이 수학여행 때 토베의 각오였을 테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토베는 완전하게 자신의 마음에 대답을 했고, 거기에 더 이상 어설픔은 남아있지 않다. 어떤 식이든 그건 하나의 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이가하마가, 미우라가, 하야마가, 에비나가 거부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예전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아슬아슬한 관계라 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2학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 전제 조건이 기분 나쁜 사실을 알리고 있어서 불쾌했다. 모두라. 모두가 거부하지 않는다고? 그런 게 자연스레 가능할 리가 없지.

 

그럼……이제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겠군.

 

나는 목발을 들어 웅성거리는 관중을 사이를 힘겹게 빠져나갔다. 토베는 그 중앙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격려인지 놀림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받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기 있는 제 4의 벽은 내가 넘어갈 것이 아니다. 그 벽을 허물고 배우들과 메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목발을 짚고 밖으로 나섰다. 데워지지 않은 공기가 폐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관객은 어디까지나 관객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한다.

 

 

 

 

나는 늘상 내가 점심을 먹곤 하던 자리에 목발을 놓고 주저앉았다. 테니스 코트에 가까운 바닥 근처에는 누가 연습을 하다 그냥 간 건 지 공이 하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공을 주웠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바람은 잔잔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들고 있던 공을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직선에 가까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공은 벽에 부딪힌 뒤 다시 나를 향해 돌아왔다. 땅에 바운드하는 공을 잡아채고 손목을 문질렀다. 히라츠카 선생님께서 하사하신 손목 아대가 근질거렸다.

 

나의 거리재기 스킬은 제대로 동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에 묘하게 안심하며 나는 계속해서 공을 집어던졌다. 요리조리 다른 선을 그리며 공은 나와 벽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했다. 그 공을 보면서 나는 최근에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작은 테니스공이 진자가 된 것처럼 왕복하며 시간을 쟀다. 푸코가 된 기분으로 공을 던지다가 바로 방금 전에 있었던 토베의 고백 사건에 생각이 이르자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더 들어가 버렸다. 벽에 부딪힌 뒤에도 속력을 잃지 않은 테니스공은 내 위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가 버렸다.

 

테니스공이 저 멀리 떨어져 통통거리며 운동장 바닥을 굴렀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테니스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공을 주워들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재주도 좋게 테니스공을 굴리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추운 날 고생이네.”

잘 왔어. 기다리고 있었거든.”

나를? 용무라도 있어?”

물어볼 게 있으니까.”

 

그 녀석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뭐든 물어보라는 신호인가. , 좋아. 바로 직구를 날려 주도록 하지.

 

토베를 부추긴 게 너지?”

?”

 

능청을 떠는군. 나는 나도 모르게 비웃음을 날렸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마. 서로가 다 아는 마당에 그런 쓸데없는 연극을 유지하려 하지 마. 짜증나니까.”

매섭네, 히키가야.”

 

그 녀석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 포즈에 진심은 없었다. 나는 증오가 담긴 눈길로 이번 일의 연출자이자 각본가를 바라보았다. 그래, 관객이 따지고 들어야 할 대상은 배우가 아니다. 그 뒤에 있는 극작가다. 다른 말로 하자면 흑막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시 한 번 묻는다. 토베에게 고백해보라고 옆에서 바람을 넣은 거, 너지?”

 

 

 

시원스러운 태도, 물러나지 않는 발.

여유가 가득한 표정, 자신만만한 눈빛.

거리낌이 없는 자세, 굽히지 않는 고개.

 

 

 

, 맞아.”

 

 

 

흑막, 하야마 하야토는 내 추궁을 긍정했다.  

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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