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 in Love

낙엽이 날렸다.

 

이기 뭐꼬…….”

 

내가 아무리 푸념을 뱉는다 한 들, 내가 처한 현실이 변할 리는 없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올 때마다 형형색색의 낙엽이 허공을 가득 물들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오늘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볼 예정이 없었으니까.

 

다들……대체 어디로 간 거야?”

 

가을하늘마냥 공활한 주차장. 원래대로라면 소풍 장소였던 공원에 도착했어야 할 텐데, 그리고 거기서 따분하게 봉사활동이나 하며 낭만과 청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학교 행사를 맹비난할 예정이었는데. 자신은 현재 인기척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산 속의 아스팔트 주차장 위에 멍하니 서 있었다.

 

아까 휴게실에서 화장실에 갔다가 통감자의 유혹에 진 탓이었다. 가을이야말로 식욕의 계절 아니던가. 그 요망한 마물을 입에 넣고 씹으려니 저 멀리 내가 타야할 버스(라고 생각했던 버스)가 출발하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전력을 다해 버스에 간신히 탑승했고, 단 한 번의 정차도 없이 단숨에 미아가 되었다. 미아의 생산 과정이 이리 쉽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 안 된다고, 진짜! 으아아아아!”

 

나는 애꿎은 나무 벤치를 세게 걷어찼다. 당연히 내 발이 아팠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짜내며 다시 버스 정류소의 버스 시간표를 확인했다.

 

, 하루에 두 번……. 장난이지? ? 장난이지? 말 좀 해봐!”

 

다음 버스가 오려면 어찌 됐건 다섯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한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몸을 끌고 저 멀리 보이는 휴게소를 향해 걸었다. 어찌 됐건 지붕 있는 곳에서 좀 쉬고 싶었다.

 

?”

 

그리고 휴게소 안에는, 같은 반 여자애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평소에 자주 아웅다웅하던 악우였다. 그 여자애는 내가 들어서자 급히 고개를 들어 나를 잠시 쳐다보곤, 안도감이 퍼져나가는 듯 하다가, 대뜸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니 날 걷어찼다.

 

끄억!”

 

이런 빌어먹을!

 

 

 

 

 

그 애는 소시지의 유혹에 졌다고 한다. 망할 가을 같으니라고.

 

정말, 믿을 수 없어……. 이런 외딴 곳에 떨어진 것 만해도 내가 한심해 죽을 지경인데, 하필 따라온 게 이런 놈이라니…….”

! 내가 따라왔냐? 고작 휴게실에 먼저 발 들인 정도로 잘난 체 하지 마시지, 미아계의 콜럼버스야!”

 

그 애는 흥 하니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깐 그래도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더니 이젠 좀 힘이 나는 모양이었다. 아니, 정말 도움이 됐다. 대화를 나눌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안심이 될 수 있구나.

 

하지만 상황은 그리 낙관적이지 않았다. 가을의 저녁은 충분히 쌀쌀맞았고, 우리는 소풍 내내 봉사활동으로 쓰레기를 주울 예정이었기 때문에 옷을 상당히 얇게 입고 왔던 것이다.

 

서로 아웅다웅하며 열을 내던 것도 처음 한두 시간, 해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대화의 빈도는 급속도로 줄어만 갔다. 멍한 눈으로 서로를 잠시 바라보고, 이내 몸을 푹 감싼 채 덜덜 떨기를 반복했다.

 

버스 언제 올까.”

…….”

그래도 밤이 되면 추울 텐데 그 전엔 좀 와야지. 선생님들도 우리 찾고 있을 거니 의외로 금방 오지 않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나타날지 몰라.”

추워, 춥단 말이야…….”

 

그런 희망적인 관측도 그 애에게 용기를 주는 건 실패한 모양이었다. 나와 만나고 나서 잠깐 얻었던 활기는 이미 그 힘을 다한 듯,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몸의 떨림이 점점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커져갔다. 반팔티만으로 이 가을 추위를 견뎌내기엔 인간은 진화가 덜 됐다. 나나, 그 애나 모두 인간이었고.

 

나는 조심스레 그 애에게 다가갔다. 꿀꺽. , 잠깐. 침을 삼킨 건 내가 아니다. 내 식도다. 나에겐 아무런 흑심도 없다.

 

미안, 거짓말이야.

 

하지만 흑심뿐만인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둘 다 추웠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닐 테니까. 나는 더 이상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고, 추위에 힘들어하는 그 애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빌어먹을 가을. 겨울에 통폐합이나 되라.

 

팔을 뻗어, 소녀를 감싸 안았다. 그 동안 싸울 땐 몰랐는데 나보다 한참이나 작다. 내 손 안에 폭 들어올 정도로. 그 애는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아니, 내가 추워서. 나 좀 살려주라.”

변태…….”

, 그래. 선도위원회에 찌르라고. 그러니 다른 사람들 올 때까진 얌전히 있어.”

그 애는 내 어색한 변명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무언가가 내 가슴 위로 번져 갔다. 나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팔에 힘을 주었다.

 

 

 

 

선생님들이 온 건 자정이 다 되갈 때였다.

 

일단 만나자마자 끌어안긴 게 첫째요, 그 뒤로 몇 대 쥐어 박힌 게 둘째요, 그리고 엄청난 양의 반성문과 봉사활동을 명받은 게 셋째였다. 그 애는 둘째가 빠졌다. 이건 불공평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악몽 같은 가을 소풍의 끝, 선생님들이 몰고 온 트럭에 타기 전 그 애는 갑자기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를 거하게 걷어찼다. 맙소사. 넷째가 있을 줄이야.

 

! 왜 때려!”

그 동안 그렇게 응큼한 짓 했으면서 이 정도 벌도 안 받으려고 했어? ! 이 정도로 봐 준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하면서 그 애는 내게 손수건을 집어던졌다. 던져? 던진다고? 너 지금 나한테 물건 집어던지게 돼있냐? 은혜를 모르는 것! 나는 멀어져 가는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열불이 나는 속을 애써 달래며 새어나온 침을 닦기 위해 손수건을 펼쳤다. 그리고 거기엔 검은색 마킹용 싸인펜으로,

 

함부로 여자 몸 만지지 마, 변태!’

 

그런 말과 함께, 3, 4, 4개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잠깐. 화를 가라앉히고 보자. 나는 이 수열이 뭔지 알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비슷한 숫자를 가지고 있어. 이건 전화번호라는 물건이지. , 웃음이 멈추질 않아. 참아, 참으라고. 지금 웃으면 꼼짝없이 변태거든?

 

먼저 트럭 안에 탄 그 애를 넌지시 보자, 작게 혀를 내밀더니 고개를 팩 하니 돌렸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PK 신청 신호로 받아들였을 테지만, 그 잠깐 사이에 여자 사람 신호 번역기가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제길, 대체 왜 귀여운 거지?

 

길었던 가을 소풍이 끝나려 하는 지금, 나는 그렇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맞이하게 되었다.

 

신경 쓰이는 여자애에게 처음 보낼 문자 메시지에는 뭘 적어야 하는가?

 

적어도 내일 해가 뜨기 전까지는 답을 내야만 할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다잡으며 트럭을 향해 걸어갔다. 차마 숨기지 못한 속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아 가을, 사랑의 계절이여.

 

Fall, in Love.

 

 

2012107

경소설회랑 - 라이트노벨 한시간 쓰기 대회

http://lightnovel.kr/freewrite/413823

대마
단편/라한대 2012. 10. 7.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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